등록 2002.06.30 18:43수정 2002.06.30 19:21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1994년 7월 25일. 김일성이 죽고 50년만의 폭염이 전국을 휩쓸던 여름. 나는 논산의 연병장에서 애국가를 듣고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애국가가 나의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군악대가 연주하던 그 애국가가 끝나면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사내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떠나야했다. 일부러 배웅을 나와준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나는 짧은 머리를 만지며 멋적게 웃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거창한 이념에 대해서 느끼지 못했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거라고 나를 애써 위로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에 대한 두려움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친구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옷을 입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고 내가 옳다고 믿는 건 반드시 표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그들의 걱정은 거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애국가가 끝나고 나는 돌아섰다. 스피커에서는 연병장으로 내려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다짐했다.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기를, 내가 두려움과 맞서 정정당당한 사내가 되기를….
<2>
군대비리가 터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누군가는 젊은 시절을 헌납하며 나라를 위해 떠나고 누군가는 권력과 돈, 줄을 이용해 군복을 입지 않는 현실이 아쉽다. 더욱 더 적극적으로 정부가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군대란 가지 않으면 않을 수록 좋다고 착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단의 현실에 선택은 없다. 거기엔 냉엄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나도 갔다 왔으니까, 너도 가야지. 안 그러면 내가 배 아프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다.
<3>
곡사포부대의 유선통신병이었던 나는 대대 신문기자로 활동을 했다. 상병을 달면서 군대에 인사사고가 일어났다. 전신주에서 작업을 하던 상병이 감전되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포대(보병부대에서 '중대' 개념)는 달랐지만 함께 훈련을 받았던 그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대대기자 자격으로 영안실을 찾았다.
영안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얀 이를 두러내며 아이처럼 웃던 그 병사가 죽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안실이 한참 남아 있었는데도 커다랗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병사의 어머니가 탈진상태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단 세음절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병사의 이름이었다. 검은 테두리가 쳐진 사진 속에서 그는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가 죽었다는 게 조금은 현실처럼 느껴졌다. 아들만 둘있는 집안의 차남이었던 그 병사. 병사는 유난히 웃음이 많고 넉살이 좋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다리가 풀려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참고있던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그의 큰형도 군대에 가서 사고사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둘째를 다시 군대에 보냈다. 잠깐동안 훔쳐본 병사의 아버지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자책감을 나는 보았다.
<4>
그 후 나는 어렴풋이 조국이 뭔지 알게 되었다. 임진강변으로 혹한기훈련을 나가 강 건너편의 북쪽을 바라보며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느끼게 되었다. 마치 안보와 햇볕정책의 차이만큼이나 강 건너편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서해교전으로 인해 조국을 지키던 사내들이 사망하고 다쳤다. 국가는 이제 그들에게 일계급 특진 이상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순직했던 소방관들이나 군인들처럼 우리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그들의 희생이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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