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소설>무대일가 6회

등록 2002.07.03 21:41수정 2002.07.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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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가량 걸은 동섭 내외는 구영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동섭의 장인, 고 이명진 처사의 제사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잠시 쉬기 위해 정자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동섭은 느티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느티나무는 밑동 반지름이 이 미터도 넘는 거대한 고령의 나무로, 대영면에서 견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백 년 수령의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매년 싹을 내고 잎을 드리우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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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무대일가 (1)

썩은 고목처럼 보이는 나무에 어떻게 수액이 흐르며 맨 꼭대기 가지까지 물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문득 동섭은 이것이 인간의 가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씨 가계는 오백 년이 넘었다. 아직까지 요행히 싹을 틔우고 잎을 내밀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고목이 되어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 때도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굳게 버티어 서서 지나는 사람들이나 동물들, 나무에 앉아 조잘대는 새들을 보고 있겠지.

"그만 가요!"


전주댁의 말에 동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일제시대 지어진 후부터 그 때까지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는 목조건물의 담을 따라 걸었다. 구(舊) 면장 집은 그 담이 끝나는 길 건너부터다. 동섭은 이끼가 낀 수십 개의 돌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오랫동안 신실한 면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주씨의 집 뒤편이 바로 처갓집이었다.

돌계단을 다 오르자, 눈앞에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그대로 올라가면 박 부잣집이고, 오른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고랑의 서지영이 사는 집, 왼쪽으로 틀어 주 면장집 뒷담을 따라 걸으면 바로 처갓집이었다.

전주댁은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 그보다 먼저 입구에 들어섰다.

"어머이!"

대문도 없고 초인종도 없는 집에 들어서며 사람의 기척을 알리는 고래로부터의 방법이었다. 동섭도 입구를 통과했다. 순간 코를 찌르는 향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보니 입구에 서 있던 삼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이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독한 냄새가 나서 동섭은 고개를 돌렸다.


"어머이!"

마당에 발을 내딛으며, 전주댁이 다시 외쳤다. 전주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둘째언니인 장수댁이었다. 장수댁은 양동이를 손에 든 채 부엌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아, 월암에서도 오네."

장수댁은 두 사람을 보자 반가워했다. 동섭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점잖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은 양반의 자손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간에 별일 없으십니까?"
"예, 별고 없으시지요?"

인사를 나눈 후 장수댁은 물을 긷기 위해 공동우물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다음으로 그들은 부지깽이를 들고 부엌에서 나온 부엉댁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주댁은 큰언니를 슬쩍 본다. 언제 보아도 큰 키에 듬직함을 지닌 부엉댁은 친정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어딘지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면 눈은 자연 팔로 가게 된다. 한쪽 어깨가 축 쳐지고 한쪽 팔이 약간 비틀어진 채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애처로운 느낌을 주는 원인이 거기 있다. 부엉댁이 팔 하나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된 것은 열 몇 살 무렵 몸에 열이 있었음에도 동네 의원에게 침을 맞힌 후부터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불행한 결혼을 했고 가엾은 여자가 되어 갔다. 혹쟁이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고, 되바라지고 싸움을 일삼는 둘째아들로 인해 가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방에서 나온 임춘복 여사가 마루에 앉아 마당에 선 그들을 보고 있다. 동섭이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이 집안의 불행은 장모가 잃은 아들 넷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마흔이 넘어서 낳았다는 아들만 살아만 있었어도 장모는 양아들을 들이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고, 그가 함양을 오가며 내키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별 일 없지요?"

인사를 한 후 동섭은 자리에 앉아 장모와 몇 마디를 나누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넓은 들과 인월면(東面)으로 흘러가는 개천이 내려다보이고, 물 건너 마을까지 보였다. 그 너머 산을 넘으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상상은 하지 않은지 오래다. 이제 그는 외부세계나 사람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마당과 집 둘레에는 배나무, 탱자나무, 꽈리나무, 모과나무 등 갖가지 나무와 꽃이 들어 차 있다. 이것들은 죽은 장인이 가꾸어 놓은 것들이거나 인간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살던 부엉댁이 심어 놓은 것들이다. 그런데 임춘복 여사는 이런 것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동섭과는 반대로 그녀는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평생을 한 자리에 붙박여 살아야 하는 식물 대신 애정을 쏟을 대상으로 인간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녀는 평생 많은 일거리 속에 있었다. 아니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그녀의 딸들은 모두 가난한 남자들과 결혼해서 자식을 제대로 먹이고 입힐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외손자들을 하나씩 둘씩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수가 열 둘에 이르렀다.

덧붙이는 글 | 작가의 말: 이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한국이 월드컵 4강에서 멈춘 것은 우리의 심장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16강, 8강, 연달아 4강에 오르는 것은 마치 몇 십억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처럼 한국인의 심장박동에 이상을 일으켰다. 아니 이상을 일으킨 정도가 아니라 터질 것처럼 끊어 넘치고 있다.  

  그리고 붉은 악마를 비롯한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보며 저것이 바로, 1919년에 일어났던 3·1운동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태극기, 한 마음으로 일어선 수많은 사람들,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자세들. 혹 어떤 사학자가 3·1운동에 대한 민중들의 의식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번 한국인의, 세계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비폭력적인 응원에 대해 조사하면 이만치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작가의 말: 이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한국이 월드컵 4강에서 멈춘 것은 우리의 심장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16강, 8강, 연달아 4강에 오르는 것은 마치 몇 십억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처럼 한국인의 심장박동에 이상을 일으켰다. 아니 이상을 일으킨 정도가 아니라 터질 것처럼 끊어 넘치고 있다.  

  그리고 붉은 악마를 비롯한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보며 저것이 바로, 1919년에 일어났던 3·1운동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태극기, 한 마음으로 일어선 수많은 사람들,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자세들. 혹 어떤 사학자가 3·1운동에 대한 민중들의 의식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번 한국인의, 세계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비폭력적인 응원에 대해 조사하면 이만치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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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학세계》에 「매직을 훔친 아이」가, 《문학과 창작》에 「리오그란데를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장례식에의 초대」, 「로터리에 앉아 있던 새」 해양문고 「우리 바다가 품은 온갖 이야기」, 에세이 <지금은 별을 보며 한걸음 내디딜 때>가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양산에 거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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