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 친구를 떠나 보내고

등록 2002.07.12 12:23수정 2002.07.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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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일찍부터 사람의 죽음이나 주검을 많이 접하며 살아왔지 싶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례식의 작은 일꾼으로 참여하곤 했던 일은 지금도 그리운 풍경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답니다.


웬만큼 사는 집은 장례식이 참 거창했지요. 만장(輓章)이라는 것도 있었답니다. 죽음을 슬퍼하거나 죽은 이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글귀를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기를 만들어서 아이들로 하여금 상여 앞에 서서 들고 가게 하는 만장의 수효는 곧 그 집의 가세(家勢)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지요.

부잣집일수록 만장이 많을 수밖에. 부잣집에 초상이 났다하면 나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장지까지 만장 하나를 들어주면 백환의 품삯을 받기 때문이었지요.

그때 서점에서 살 수 있는 세계명작이나 위인전 한 권이 삼백환이었습니다. 초상집의 만장을 들어주고 받은 돈을 모아서 누이동생과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곤 했던 기억이 참으로 아련합니다.

내가 번 돈으로 책을 살 때의 그 기분이 어찌나 좋았던지…. 그리고 그 책을 등잔불에 머리칼을 그을려가며,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읽을 때의 그 감동을 지금 어찌 표현할까요.

사람의 시신을 처음 접해 본 때는 고교 2년 시절이었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가난한 신자의 죽음이라 시신을 염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에 고교생인 나까지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나는 고교생 시절부터 사람의 시신을 만지는 일과 상여 메는 일을 했던 거지요.


수많은 시신, 주검의 집단을 접해 본 것은 월남 전장에서였습니다. 영현실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이미 만원이 되어버린 영현실 밖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마당에 하얀 시트를 덮어쓴 채 누워 있던 수십 구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던 때의 그 무아(無我)적이고도 공동(空洞)적인 심정은 지금에도 내 가슴에 폐허처럼 남아 있지요.

지금까지 내 손으로 염습을 해서 떠나보낸 시신이 백 구는 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교회 신자 가정에 초상이 났다하면 시신을 염습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상여도 많이 메었지요. 그러니까 나는 일찍부터 염장이에다가 상여꾼이었던 거지요. 생각해 보면 자유직업인(?)인 죄 탓이기도 하고, 천주교 신자로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덕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본의 아니게 염장이와 상여꾼 신세를 거의 면했지 싶습니다. 상여를 메지 않게 된 것은 좀더 오래 되었지요. 지금은 시골에서도 상여를 거의 쓰지 않기 까닭이랍니다. 웬만한 산길에는 영구차가 다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내가 사는 고장인 태안에도 '장의예식장'이 생겨서 신자 가정들도 거의가 자기 집이 아닌 장의예식장에서 초상을 치르기 때문에 내가 염을 해줄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장의예식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가면 시신 염습도 전적으로 장의예식장의 소관이 되기 때문이지요.

생각하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나도 앞으로 상(喪)을 당하게 되면 장의예식장을 이용하게 될 터인데, 그 동안 내가 수많은 신자 집에 가서 정성껏 염을 해준 것과는 달리 우리 집에서는 신자들의 그런 아름다운 봉사 모습이 없을 테니….

죽은 이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聖體)를 모시고 살았던 '성전(聖殿)'이었음을 생각하며 신자들이 정성스럽게 염을 하는 것과 장의예식장의 전문 염장이가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 같을 리 없으니….

하지만 신자들이 하든 직업 염장이가 하든 수의를 입은 시신이 땅에 묻혀서 흙이 되거나 불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더 중요한 것은 시신을 다루는 일보다 육신을 떠난 영혼을 생각하는 일일 터…. 신자들에게 염 수고를 끼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 싶습니다.

어제, 또 한 명의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또 한 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이중의 뜻이 있답니다. 세상살이 연륜 속에서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는 점점 동안이 짧게 생겨나게 될 일이라는 뜻….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나보다 두 살이 위인 한 친구가 간경화라는 병을 얻어 몇 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연 이틀 장의예식장에 가서 '연도(위령기도)'를 하고 수많은 동창들과 어울리고 하면서 그 친구의 모습을 많이 떠올렸답니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 앞으로 시오리 길을 달려 등·하교를 하던 그 친구의 껑충한 모습도 많이 떠오르고, 투병을 하며 서예 공부로 몸과 마음의 평정을 이루려고 애쓰던 모습도 떠오르곤 했지요. 간경화라는 병을 얻어 66세라는 아까운 연세로 세상을 뜨신 내 아버님 생각도 많이 나고….

일찍이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냉담'의 길에 들어서서 20년도 넘게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친구였지요. 끝내 냉담 생활을 접지 않고 죽는 날까지 미사 참례 한번 하지 않은 것이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강남성모병원에서 사경에 처한 순간에 원목 신부님으로부터 '종부성사'를 받았다고 하니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부인이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고, 특히 총각인 아들이 청년회원으로 교회 봉사도 많이 하기에, 신자들의 연도 행렬은 풍성한 편이어서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래도 복이 있다 싶고….

연도를 하면서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그 친구의 건강한 모습의 영정을 보자니,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통풍과 당뇨 관리를 하며, 건강 문제로 고심하며 살고 있는 내 처지에 대한 비애도 새삼스럽게 가슴을 치는 듯싶고…. 다시금 인생 무상을 체감하는 기분이었지요.

그 친구가 한창 투병 생활을 하던 2000년 가을 그 친구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하나 써서 인터넷 공간의 한 사이트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투병을 격려해주기 위해 쓴 글이었지요. 후에 그 친구에게 글 얘기를 했더니 보고 싶다고 해서 한 장 프린트를 해서 주기도 했고….

일종의 낙서인 그 글을 여기에 소개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죽기 다 글렀디야!

오늘 낮에 결혼식장에 갔다 왔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아들을 여의는 대사라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친구들 중에는 간경화를 앓고 있는 친구도 한 사람 있었습니다. 달포 전에 만났을 때는 얼굴 색이 검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얼굴에 혈색도 있고 건강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반가운 마음에,

"친구, 얼굴 색 좋네."
하니, 그 친구 왈,

"응, 의사가 나보구 죽기 다 틀렸다구 허데."
나는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좌중을 향해,
"형환이, 죽기 다 글렀디야!"하면서―.

그 친구의 그 농담이 내 가슴에 안쓰러운 느낌도 안겨 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체로 기분 좋은 하루인 것 같습니다.

(2000년 10월 8일/작가네트/자유인)


아주 짧은 낙서 같은 글이지만 내 마음을 담뿍 담아서 이 글을 쓰고 인터넷 공간에 올린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때가 벌써 재작년 가을이라니…. 세월이 빠르기야 하지만 아직 만 2년도 안된 시점에서 그 친구는 결국 고인이 되었고….

그 친구의 장례에는 상여도 동원되었습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지낸 후 일단 영구차로 장지 근처까지 간 다음 미리 준비해 놓은 꽃상여로 유해를 옮겼지요.

그 상여를 동창 친구들이 메었는데, 동창들은 하나같이 상여를 오랜만에 메어보는 처지였습니다. 상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시절이어서보다도, 이제는 상여 메는 나이들을 거의 '졸업'했기에….

모두 50대 중·후반의 나이들임에도 동창들이 상여를 멘 것은 죽은 동창 친구에 대한 정리 때문일 터였습니다. 그러나 인원이 넘쳐서 나는 일찌감치 제외되었지요. 한 친구는 상여를 메고 가면서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우덜이 아직은 상여를 멜 수 있는 나이긴 허지먼, 동창 친구들 어깨 위에 누워서 북망산 가는 거, 썩 잘허는 짓이 아니여. 아무도 이 친구 본받을 생각 허지 마."
그러자 한 친구가 답변을 하는데, 예리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게 마음대루 되는 거라니?"

아직 시골에는 미신적인 관습이 남아 있어서, 어느 한 집의 뒤로 나 있는 번듯한 길로 상여가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집 앞의 수풀 우거진 비좁은 길과 밭둑 길을 밟고 통과하느라고 친구들은 적잖이 고생을 하기도 했지요.

이윽고 하관을 마치고 산의 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친구들은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듯 서로 욕을 섞은 농들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한 친구의 이상한 말 때문에 재미있는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우덜 중에서 다음 차례는 누가 될라나? 그러구 그때는 원젤라나?"
"그걸 어느 귀신이 안다니? 그건 귀신두 물르는 일이였마."
"귀신이 있는지두 물르면서 귀신 얘기는 왜 허여?"
"암튼 내가 원제 죽을 지 물르니께 그냥 저냥 사는겨. 사람들헌티 죽는 순서가 정해져 있구, 내가 원제 죽는다는 걸 안다먼 하루라두 제대루 살 수 있겄냐?"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 맞게, 무슨 방편이 자연적으루 마련되겄지. 안 그려?"
"어쨌거나 다음 순서가 누굴지두, 그게 원젤지두 물르니께 그냥 저냥 지금처럼 살어. 그게 장땡이여."

잠자코 있던 나는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지금처럼 그냥 저냥 산다니?"
"또 무슨 말 헐라구 그려?"
"이제는 나이들을 먹을 만큼 먹었으니께 생각들을 좀 허구 살어야지. 나는 왜 내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살고 죽는가? 죽음이란 대체 무엇이고,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가? 그런 의문들을 가슴에 안고 진지허게 고민허며 사는 것두 좋지 않겄남?"

"그런다구 무슨 답이 생기냐? 또 그러면 밥이 나오냐? 세상을 골치 아프게 살 필요 읎어. 이렇게 살으나 저렇게 살으나 한 세상 살다 가는 건 다 마찬가지니께 지 편한대루 그냥 저냥 사는 게 지일여. 안 그러냐?"
"그런 소리 집이 가서 자식들헌티는 허지 마. 잘 가르치는 것두 아니구, 자칫했다간 아버지 무식허다는 소리를 들을 수두 있으니께."

나는 그만 손을 털고 일어섰습니다. 아직은 친구들 다수가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나이들임에도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고뇌를 안고 살기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현실이었습니다. 60도 못 먹고 죽은 친구의 장례를 치르는 자리에서도 밀도 있는 인생 무상도 느끼지 못하고 깊은 성찰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먼저 일어선 내게 한 친구가 말하더군요.
"죽은 형환이가 내 꿈에 나타나서, '야, 죽구 보니께 하느님이 있더라. 그러니께 너두 하느님 믿어라'라구 헌다면 나두 하느님 믿을게."

나는 씩 웃으며 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죽은 형환이가 자네 꿈에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는 일은 절대루 읎겄지먼, 친구가 그런 기대를 갖구 사는 건 좋은 일일겨."

그리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오는데, 한 친구가 아까 했던 말이 내 등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우덜 중에서 다음 차례는 누가 될라나? 그러구 그때는 원젤라나?"
때는 모르지만 다음 차례는 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한 명의 친구가 세상을 떴습니다. 우리 동창들 인생의 연륜 속에서 그것은, 앞으로는 점점 동안이 짧게 생겨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착실한 '준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냥 저냥 살기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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