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사체에 2발이나 쐈나"

의문사진상위, 84년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타살' 확신

등록 2002.08.20 21:47수정 2002.08.2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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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건이 일어난 부대 지도와 고 허원근씨의 사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현장브리핑 자료.

사건이 일어난 부대 지도와 고 허원근씨의 사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현장브리핑 자료.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8월 20일 오전 11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이하 위원회)는 18년 전 자살이라고 처리됐던 고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이 실제로는 타살이었다는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1984년 4월 1일 허원근씨가 복무하던 3연대 1대대 3중대본부 내에서 중대 간부의 진급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있었다. 새벽 2시~4시 사이 이 자리에서 다른 간부와 말다툼을 하던 한 하사관이 뛰쳐나와 내무반에서 행패를 부리던 중 허씨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쏘았다. 허씨는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위원회는 이어 "사건 직후 허씨의 피를 감추기 위한 물청소가 실시됐으며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폐 유류고 울타리 주변에 옮겨둔 사체에 (누군가가) 총탄 2발을 더 쏘았다"고 밝혔다. 위 조사내용에 따르면 하루새 살인뿐 아니라 사체유기 및 손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은 은폐, 진실은 왜곡한 <국방일보>
"허씨 타살의혹 제기가 군 사기 꺾는다"

2000년 3월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허원근 사건의 타살 의혹에 대해 방영하자 <국방일보>는 3월 17일 이에 대한 반론으로 '사실은 죽음, 진실은 자살'이라는 기사를 실어 '그것이 알고싶다'가 왜곡방송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고 허원근씨 가슴에 난 총상은 즉사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았으며 허씨는 '적극성이 결여된 소심한' 성격이었다. <국방일보>는 육군칠성부대 신병교육대 김종현 상사의 말을 빌려 "연승부대는 장병 모두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엄정한 군기와 막강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전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전통 있는 부대"이며 "이 방송으로 인해 부대 장병들, 특히 병사들의 내무생활을 책임지는 간부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군을 불신케 했다"고 비난했다.

<국방일보>는 "김종현 상사가 사건발생과 조사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위원회는 김 상사가 "당시 사건 내용도 잘 모르는 하사관"이라고 반박한다. / 권박효원 기자
그러나 당시 허씨 사망사건을 조사했던 헌병대는 15일간의 조사 뒤 허씨가 총탄 3발을 쏘아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소속대 중대장과 사병 1명에게 구타 등의 책임을 물어 징계가 내려졌지만 정작 허씨에게 총을 쏜 하사관은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당시 사망한 시체를 뚫고 지나간 총탄 자국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았다는 점, 또 주위 사병들의 "허 일병은 밝은 표정으로 첫 휴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진술 등 여러 의심스런 정황이 있었지만 '자살판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유족들도 허씨가 스스로를 3발씩이나 쏘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헌병대 조사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족들이 진정을 내 실시되었던 1984년 육군 범죄수사단 재조사에서도 결국 허씨 사건은 자살로 발표됐다.

"군대 내 의문사, 제3기관이 조사해야"


위원회가 허씨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모 하사관이 총으로 허씨를 쏘아 숨지게 했다"는 몇몇 사병들의 용기 있는 증언 덕분이다. 그러나 허씨의 죽음은 여전히 미완의 진실이다.

사건 은폐를 지시한 지휘체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왜 굳이 사체를 옮긴 뒤 2발을 더 쏘았는지 등 은폐 과정을 둘러싼 의문점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현장 증언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조사가 종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원회가 중간결과를 발표한 것도 더 많은 목격자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다.


위원회 측은 이에 대해 "현장 목격자들이 10여명 있지만 모두 목격하지 못했거나 기억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조사 당시 이들이 헌병대로부터 심한 대우를 받았고 여러 차례 반복된 조사로 인해 후유증도 겪은 터라 심적 부담이 클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또한 위원회는 "군대 헌병대는 조사와 재조사를 거쳤는데도 사건을 은폐한 채 자살이라는 결과만 반복해 진실을 막았다"며 "이번 사건을 군대 내 의문사 수사 과정에 정면으로 문제제기 하는 계기로 삼고 이후 유사 의문사 사건은 제3의 기관이 조사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겠다"
고 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영춘씨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지난 18년 동안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422일 장기농성까지 불사했던 허영춘(63)씨는 "가해자가 나쁜 게 아니라 군대가 나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그 뒤에 뉘우칠 수도 있다. 나는 가해자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단, 그(가해자)가 다시는 군대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말이다.

허씨도 처음에는 다른 부모들이 그렇듯 내 아들을 죽인 놈에게 보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싸움을 이어나갔다. "탄원해도 소용없으니 몸조심해라"는 협박도 허씨의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 허씨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아들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브리핑하는데 한 병장이 지나가며 살짝 "아버님, 총 2발을 사체에 쏘았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허씨는 그 후로 법의학을 공부했고 처음에 쏘았던 오른쪽 가슴과 사망 후 쏜 왼쪽 가슴의 피가 다른 색깔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의 죽음을 보도하는 기사원고를 직접 써서 신문사를 돌았다. 그 사이 허씨는 의문사유가족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허씨는 아들의 죽음만 절실하지 않다. 다른 아들, 딸들도 다 내 자식같다.

"88년도에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했죠. 그때부터 다른 젊은 사람들의 죽음이 절박하다고 느꼈어요. 나는 지금 개인의 한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억울한 죽음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죠. 이번 중간 발표가 유가족들의 특별법 제정에 도움이 되기만 바랄 뿐이에요."

허씨는 사인이 규명되기 전까지 장례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화장된 아들의 유골함을 지금까지 땅에 묻지 않았다. 아들이 땅 속에서 잠들고 나면 지금의 아픔을 잊어버릴까봐 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곧 죽음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면 아들을 쉬게 할 생각이다. 18년 동안 기다려온 아들의 안식을 위해서는 목격자의 용기있는 고백이 절실하다. / 권박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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