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만드는 사회, 그리고 문성근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29>

등록 2002.09.14 13:22수정 2002.09.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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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다. 훌륭한 스승이 되고자하는 한 교사가 엄숙주의에 빠진 경직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나머지 퇴출되는 비극을 그린 영화다. 이때 훌륭한 사도(師道)를 아는 양심적이고 정직한 제자들이 그를 따르지만 결국 고립되어가는 자신의 운명 앞에 어쩔 수없이 절망하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도 이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하여 섬뜩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최근에 동아일보사에서 벌어진 한 간부의 사퇴 - 증발사건이 그렇고 타살사건으로 입증된 허일병 의문사를 둘러싼 진실게임의 공방이 또 하나다. 둘 다 주류언론계 일각의 몰상식과 무모함이 백일하에 드러난 꼴이지만 이 속에서 사라져가는 개인의 모습은 처량하고 우울한 울림을 준다.

<한겨레신문> 11일자에 소개됨으로써 알려진 한 청와대 출입기자의 증발사건을 보자. 그는 자신이 쓴 '박지원 실장' 기사를 일방적으로 수정한 데스크에 항의해 사표를 내고 잠적했다는 것이다. 기자생활을 해본 필자로서 그 기자의 쓰라린 속마음이 짐작된다.

문제가 된 기사는 박지원 실장의 권력독점을 비판하는 내용. 문제는 박 실장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쪽으로 부풀리다보니 처음에 기자가 쓴 원문을 '데스크 마음대로' 손대거나 가필했다는 데 있다. 주간 <미디어오늘>은 또 다른 청와대출입기자의 말을 인용, "이 기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기사의 내용과 표현이 데스킹 과정에서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정, 가필되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한 것 같다"고 속사정을 전했다.

그 기자는 지난해 언론사세무조사과정에서 사주 부인의 자살을 정치적 희생으로 추어올리는 동아일보의 비틀린 모습을 보고 "동아일보의 침몰을 보는 느낌이다"라고 말하는 등 회사 분위기에 대해 고민하고 답답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답답함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그 기자는 어느새 왕따당해 있는 자신과 싸늘한 사내 분위기에 다시 절망할 것이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이런 일은 사실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는 언론계의 현실이다. 사주의 노선에 따르지 않으면 왕따당하는 편집국 내의 분위기는 이른바 주류언론인 조·중·동 모두 다르지 않다. 이를 두고'조폭언론'이라고 지칭한 한 논객의 평가는 그래서 크게 지나치지 않다.

허일병의 의문사를 둘러싼 '진실감추기' 또한 어쩌면 사주의 노선에 충실하려는 기자의 뒤틀린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할 만하다. 조선일보는 지난 8월20일 의문사위가 발표한 '허일병은 타살되었다'는 타살과 은폐조작의혹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그로부터 일주일 지난 28일부터 취재, 보도하기 시작했다.

권위 있는 언론기관으로서 발표기사에 만족할 수 없다는 자존심보다 이미 군 수사당국이 세 차례에 걸쳐 조사, 발표한 사건의 진상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군권력 내부의 목소리를 충실히 전달하라는 데스크의 지시에 따른 기사일 것이다.

기사 속엔 18년 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낸 허일병 유가족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조선일보의 의도적 기사작성에는 위협적인 취재기자의 유도성 인터뷰도 있어 진상을 밝힌 두 사병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였다.(한겨레 9월11일자 사회면)


"나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 나 혼자서 진실을 말하다가 이나마도 먹고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겁난다"는 증언사병의 말 속엔 왕따의 두려움이 배어 있다. 이 장면에서 인터뷰하는 기자의 고압적인 목소리는 폭력배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데 왜 당신만 그런 식으로 진술했느냐"가 기자의 질문방식이다. 이에 대해 한 증언자는 "불쾌하고 당황해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둘러댔다"고 실토했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가. 언어의 폭력도 이 수준이면 살인적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구석은 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날아온 이창동 감독과 배우 문소리의 승전보다 타고난 지체부자유자와 전과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오아시스>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탔다는건 너무나 희망적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지체 높은 양반이야기만 다루는 <조선일보>가 애써 외면한 왕따들의 숨김없는 이야기가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a 방 인 철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방 인 철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 희망네트워크

이 대목에서 우리들의 또 하나 왕따 배우 문성근의 외로운 사투에도 기대를 걸어보자. 그는 이제 더 이상 딴따라가 아니다. 거대언론을 상대로 대결선언을 하고 정치팬클럽 노사모를 어느새 개혁국민신당으로 탈바꿈하는 대장정의 길에 나선 당당한 혁명적 정치인이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유시민의 외로운 행보는 아직 주류언론에 크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 고쳐쓰기의 확고한 신념에 바탕한 고난의 행군도 언젠가 빛을 볼 날을 기대해보자. 그에겐 10만개 미 네티즌의 환호가 뒤를 받쳐주고 있어 그래도 외롭지 않다.

"아버지로 따지면 정몽준보다 내가 낫다, 나를 찍어라"고 포효하는 그의 연설(8월31일 광주동신대 연설)에는 위대한 정치가의 당당함과 그 가능성이 엿보인다. 국내에서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국제적 공인이 곧 뒤따를 것이니까.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방인철씨를 비롯해 김택수 변호사,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권오성 목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소설가 정도상씨, 이용성 한서대 교수,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필자 주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29>는 9월 17일(화) 이용성교수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방인철씨를 비롯해 김택수 변호사,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권오성 목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소설가 정도상씨, 이용성 한서대 교수,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필자 주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29>는 9월 17일(화) 이용성교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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