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조선>의 잣대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31>

등록 2002.09.24 17:58수정 2002.09.2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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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어느 편을 응원해야 하나?'

지금은 우스운 질문이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일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극악무도한 적'인 북한과 비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 40여 년 동안 이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질서와 민족 분단 역사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본주의 '우리 편'과 공산주의 '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을 배워야 했다. 그러니 일본은 밉기는 하지만 우리 편이었고, 북한은 그저 '초전박살'을 내야할 적일 뿐이었다.

지난 17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본 고이즈미 총리 사이에 정상회담이 있었고 4개항으로 된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조선일보>도 이 회담의 중요성을 반영하듯이 회담을 전후한 3일간 8편의 사설 중에서 17일 "평양(平壤), 동경(東京) 뚫리나", 18일 "'평양(平壤).동경(東京)' 그리고 한국(韓國)", "DJ와 다른 고이즈미 협상법(協商法)", 19일 "남(南)에도 납치(拉致). 테러 사과해야" 등 4편의 사설을 실었다.

무엇보다 회담 내용을 소개하면서 18일자 사설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인정', '양측의 수교 교섭 재개', '일본의 대북 경제협력 제공' 등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당일 <조선일보> 4면에 나온 합의문 전문의 내용을 축약하면 '첫째 양국 간 국교정상화 노력, 둘째 일본의 과거 식민지 지배 사과와 경제 협력, 셋째 국제법 준수와 일본인 재산과 생명에 관련된 현안 문제(외교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의미한다...필자 주)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과 재발 방지, 넷째 지역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북의 미사일 발사 유예'가 그 내용이다.

두 내용을 비교하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공동선언문 내용을 자의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 납치문제는 결코 가볍게 치부할 사안이 아니라'(18일자)고 지적하였고, 여러 면의 기사에서도 3일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관련된 문제는 <조선일보>의 공식 입장인 사설이나 다른 면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남북이 함께 겪었던 일제 침략과 수탈, 체포와 사망, 강제 징용과 징집, 정신대 문제 등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그나마 '14인(人) 납치, 들끓는 일본(日本)'이라는 19일자 한 컷 만화로 된 조선만평이 기자들과 논설자를 대신해서 구색을 갖추어주었다.

또 <조선일보> 17일, 18일 사설에서는 '한.미.일 3국 공조 체제의 정비'(17일자), '한.미.일 3국 공조체제 강화하는 노력이 더 한층 절실해졌다'(18일자)는 지적을 하고 있다. 즉 북.일간 회담에서 혹시라도 일본이 '정치적인 전리품'을 위해서 '우리 편'인 '한.미.일 3국 공조 체제'라는 틀을 약화시키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 최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7일자).


또 '핵.미사일 관련 합의'도 '구두 약속'만 있으므로 앞으로 '미.북' 대화를 통해서 더 짚어야 한다(18일자)고 문제 제기를 하며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을 전제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하나의 체제로 존재하고 있는 한 한반도 평화는 북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냉전이 끝난 이 시대에 동북아 평화는 남한과 북한, 일본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서로 공존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사설은 북한과 일본이 협상을 통해 어떤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일본이 협상하는 과정에서 '우리 편'끼리 공조를 무너뜨리게 될지 여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이 공존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적'이라는 발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답답한 글이 18일자 '협상법'에 관한 사설이다. 일본 고이즈미총리가 '철저하게 계산된 실무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취했기에 '김정일 외교의 깜짝 쇼가 끼어들지 못했고', 그 결과 협상에 성공한 것처럼 논하고 있다. 일본측의 이런 '냉정한 협상' 전략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행적을 검토한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온 것인데 이런 '상황'은 'DJ 대북 정책의 문제점을 여실히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논리의 비약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무리 DJ 대북 정책이 못마땅하더라도 '한 손으로 가벼운 악수만 하지 않고' 포옹으로 반가워하고, '점심식사도 따로 하지 않고' 공동 만찬을 하였던 것을 '대북 정책의 문제점을 여실히 방증하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으니 너무 가볍고 유치하다. 사설이 이 정도니 <조선일보>의 다른 기사들 수준은 어떨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전 세계에서 냉전 질서도 무너졌다. 이제는 어떤 이념을 가졌든지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는 길이 국가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북한은 10년간 고립을 자초하며 주민 생존의 위협과 체제 불안정을 겪고 나서 이제야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하고자 나섰다.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를 그 편입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보상금을 원시적 자본으로 축적하고, 앞으로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와 해외 차관과 기술 협력을 통해 내부 생산력을 높이는 길을 택하게 될 것이다.

북한도 이제야 자본주의 세계화 추세를 인정하고 방향을 크게 선회하고 있다. 이제는 '초전박살'을 내야 할 냉전 시대의 '적'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로 가는 동반자이고, 공존해야 할 상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그래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어렴풋하게라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a 권오성 목사(수도교회)

권오성 목사(수도교회) ⓒ 최정은

축구 시합에서야 북한이나 일본 어느 편을 응원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간지 사설과 기사에서는 우리 시대 현실을 냉전 시대 잣대로만 들이대는 습관을 버릴 때가 되었다. 이 악습을 버리지 못하면 유수한 언론의 글들이 고등학생 논술 연습장만도 못한 억지 글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권오성 목사를 비롯해 이용성 교수, 김택수 변호사,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소설가 정도상씨,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덧붙이는 글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권오성 목사를 비롯해 이용성 교수, 김택수 변호사,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소설가 정도상씨,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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