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세탁기를 고쳤습니다

등록 2002.09.29 13:21수정 2002.09.3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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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신혼 때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10년 후에도 서로 변하지 말고 신혼처럼 그렇게 살자.”
그 말 덕분인지 결혼한 지 7년째인 지금도 신혼 때의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달리 우리의 결혼생활이 일곱 해를 넘기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잠시도 허락하지 않는 귀염둥이 두 딸, 이젠 모두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버린 젊은 날의 친구들, 신혼생활을 함께 시작한 가전제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두 보배나 오래 삭을수록 좋다는 친구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고장신호를 내 보내는 가전제품들은 여간 골치거리가 아닙니다.

한번 사면 10년을 두고 쓸 줄 알았는데 아직 6년 밖에 되지 않은 오디오는 CD를 잘 읽어내지 못하고, TV는 제 색깔을 내기에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것이 세탁기입니다.
빨래가 조금만 많으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전원스위치가 망가져서 물이라도 튀면 누전이라도 되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밸브가 고장 났는지 세탁기에 물이 가득 찼는데도 물이 끊기지 않고 계속 흘러 넘쳤습니다. 하는 수 없이 수도 꼭지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빨래는 끝냈지만 계속 그렇게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AS센터에 전화를 걸려다가 말고 잠깐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즘 나오는 세탁기의 용량이 10kg을 넘는데 거기에 비해 우리 세탁기는 좀 작아 보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삐걱거리던 세탁기를 돈 들여 수리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쓸 수 있겠나 싶어 이 기회에 새로 하나 살까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 한참 광고를 하는 드럼식 세탁기도 탐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내에게 세탁기 새로 사자는 말을 꺼냈다가 벌 받을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만 잔뜩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AS 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밸브를 교체해야 할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출장비 포함해서 십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 거라고 했습니다.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이 있을 지 없을 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난감했습니다. 조금만 고치면 쓸 수 있는 걸 버리고 새걸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쳐 쓰자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으니 말입니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한가지 힌트를 주었습니다.

“고장난 건 찬물 밸브니까, 더운물 밸브를 떼서 바꿔 달면 안돼?”
아내 말이 맞았습니다. 여지껏 거의 사용하지 않은 더운물 밸브는 상태가 좋을 테니까 그걸 찬물 밸브와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솜씨 없는 제가 세탁기 내부를 열어 밸브를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탁기에게 속임수를 쓰기로 했습니다.

찬물밸브와 연결되어 있는 호스를 떼어내어 더운물밸브와 연결했습니다. 이렇게 해 두면 세탁을 할 때 물 온도 선택버튼만 한번 눌러 찬물 대신 더운물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탁기는 온수밸브를 통해 찬물을 쏟아 냈고, 빨래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장이 난 찬물 밸브까지 다 고치진 못했지만, 이대로도 몇 년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손을 보면 멀쩡히 잘 쓸 수 있는 세탁기를 버리고, 새 것을 사려고 했던 저의 행동이 부끄럽습니다. 적절한 소비는 경제를 살린다지만, 적절하지 않은 낭비는 욕을 들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낭비하려던 마음도 세탁기에 넣고 한번 씻어내야 할까 봅니다.

아울러 생산된 지 몇 년 지나지 않는 제품을 부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요즘은 고장이 나서 버리는 게 아니라, 싫증이 나서 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는 하지만, 손때 묻은 제품을 여러 번 고쳐서라도 오래도록 사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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