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은령, 피자두나무를 꿈꾸다

첫 시집 <통조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등록 2002.10.30 11:27수정 2002.11.0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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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령 시인의 첫 시집 <통조림>
▲김은령 시인의 첫 시집 <통조림> 모아드림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띄워주기에 인색한 문학평론가 김용락의 칭찬이다. '시를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출발시키고, 과장된 제스처를 쓰지 않고, 진정성을 지키려 애쓴다는 점에서 인생에 대한 훌륭한 비평의 시이며, 신뢰감이 가는 시다.'

김은령의 첫 번째 시집 <통조림>(모아드림)은 위에 언급된 김용락의 상찬에 값하고 있는가? 서른 일곱의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온 등단 4년차 신인작가의 처녀시집 한 권만을 놓고 가부를 답하기엔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시는 세상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다는 것.


표제작 '통조림'은 두 눈을 가린 채 파국을 향해 무한의 질주만을 계속하는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타의에 의해 빼앗긴 인간성의 회복까지 노래하고 있다.

'대형마트 진열대 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완두콩 통조림/금빛 양철 뚜껑을 열어 젖히는 순간/오래된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들을/거세당한 얼굴들로 빠져 나오고.../탱탱하게 부풀어진 욕망의 절정들/부패되지 않게 봉인되어 역사의 한켠에/빼곡하게 진열되고 있다/누군가를 위한 두엄조차 될 수 없는...'

썩어서 거름이 됨으로써 또 다른 꽃을 피우는 자연의 순리조차 거부하는 통조림. 김은령은 거기에서 물신(物神)이 야기한 공포를 본다. 공포에 열린 시인의 동공은 당연지사 세상사의 '순리'대로 살아온 나무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김은령의 시에는 유독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대추나무, 석류나무, 탱자나무... '피자두나무'라는 생소한 이름도 있다.

'모래 바람에 갇혀/혜초를 읽는다/먼, 먼 서역으로 외봉 낙타 한 마리 사막을 건널 때/출렁, 혹 속으로만 흐르던 물/내 갈증을 타고 와 붉은 잎들이 저 뿌리 적시네.../황사 부는 밤/꽃 진자리마다 종소리를 내는/향기로운 독(毒)/나는, 다시 그 한 그루 피나두나무로 돌아갈 수도 없고.'
-- 위의 책 중 '피자두나무를 지나다' 부분 인용.


시인 이하석은 김은령의 시를 두고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든다'고 말했다. 위 시도 마찬가지다. 피자두나무처럼 살고싶은 김은령은 '먼 서역'과 '황사 부는 (이곳에서의)밤' '낙타(라는 동물)' '피자두나무(라는 식물)'의 경계를 위험스레 넘나들며 세상과 인간, 환멸과 다시 꿈꾸는 희망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들 중 절창은 '봄날'이다.


'...빈 가지가 되는 일/세상 한 쪽을 당차게 열어 누군가를/맞아들이는 일이라는 걸/비로소 알았습니다.'

누구나 겸허함과 포용력을 꿈꾼다. 그러나, 삶 속에서 그것들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앞으로도 김은령의 시가 '빈 가지'가 되어,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웃들을 기쁘게 '맞아들이'기를 기대해본다.

통조림

김은령 지음,
모아드림,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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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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