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 학벌 구애 안받는 독일정치가

등록 2002.10.30 11:49수정 2002.11.0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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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학력이 전부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상고 나온 노무현씨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후 한국에서는 명문가문 출신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소위 초일류 교육과정을 밟았다는 그들의 눈에는 기실 상고 등 실업고등학교는 정규교육기관으로도 안 보인다는 말인데, 대학을 나와야만 균형 잡힌 시야를 갖춘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눈이야말로 대다수 국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특권선민의식에 절어 균형과 폭 모두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람마다 성장여건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강남출신 수험생들의 서울대 진학률이 여타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성장여건이 소위 말하는 학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출신 학교가 개인 스스로의 자질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문가문출신에 최고 학벌을 지닌 사람들만을 지도자감으로 한정하려는 태도는 성장환경이 그들과 달라서 다른 방식 다른 시기에 지식과 인격을 쌓은 재목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 손실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발상이다.

독일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인습과 편견, 증오심과 거짓선동에 휩쓸린 끝에 파국을 맞았던 나찌시대를 반성하고 합리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인들이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합리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한 독일 민주주의의 성숙성은 정치지도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독일 국민들에게 따뜻한 아버지 같은 존재인 대통령 요한네스 라우는 17살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1년여 진로를 고민하다 실업학교에 다시 들어갔던 사람이다.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는 푸주간 집 아들로 태어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졸업 직전 가출해 수년 간 유럽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 결혼 후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있던 고교중퇴의 학력 소유자다.

지난 9월 총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한 독일 최고 권력자 게하르트 쉬뢰더 수상은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야간 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다시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통과해 법대에 진학했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근대학문의 수많은 분야를 태동시켰고 대학교수의 사회적 발언권이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의 입김 못지 않게 강할 정도로 학문을 존중하는 곳이 독일이지만, 지난 총선 기간 중 그 어느 정치가나 언론도 현 연합여당을 대표하는 이들 세 사람의 학력이나 성장과정을 문제시 하지 않았다. 출신성분과 졸업장만으로 사람의 됨됨이와 지성을 예단할 수 없고, 정치가는 그가 걸어온 정치적 여정과 언행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통용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실업학교를 나온 라우는 청소년 시절부터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독서를 통해 익힌 종교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오랜 기간 정치력과 지성을 검증 받았다. 고교 중퇴생 신분으로 68 학생운동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피셔는 사회개혁운동을 이끌며 지금껏 30년 가까이 정치력을 검증받아왔다.


유럽방랑 후 프랑크푸르트 대학 강의를 청강하며 익힌 사회철학적 교양과 독학으로 익힌 영어로 4년 넘게 외무장관일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는 그는 매번 여론조사에서 가장 직무를 잘 수행하는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쉬뢰더는 야간 종합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청년 사민당 당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자질과 안목은 사실 상 사춘기 때부터 검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입관을 버리고 해당분야에서의 활동과 성과를 길게 추적하여 결론을 도출해내는 이런 식의 평가방식이 관례가 된 독일에서는 정치가가 학벌과 가문을 내세우며 세몰이를 한다거나, 연예인이나 기업가가 인기나 사업능력을 내세워 갑자기 정치가로 변신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출신성분에 따라 능력을 예단하기 보다는 실제 능력을 존중하고 분야별 특성과 전문성을 중요시하는 독일 국민들의 이와 같은 합리적 인물평가능력이 두 번의 패전을 딛고 일어선 독일사회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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