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사법제도 원칙 외면한 판결

미국 현지에서 본 여중생사망사건 무죄 판결

등록 2002.11.24 01:39수정 2002.11.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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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 도로에서 미군 전차 구난 차량(현재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두 여중생은 장갑차 또는 전차에 치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여중생을 사망케 한 미군의 차량은 ‘전차 구난 차량’으로 전차나 장갑차가 고장이 나서 기동불능 상태가 되거나 늪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견인하는 차량이다)에 의해 사망한 사건에 대해 11월 20일과 22일 각각 미군 영내 형사 재판에서 관제병과 운전병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들의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서 관제병과 운전병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된 이번 사건은 피의자에 대한 무죄 추정의 원칙과 철저한 증거재판주의를 지향하는 미국의 사법제도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통상적인 미국의 재판 절차와 과정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공무상 과실치사와 같은 범죄 혐의의 경우는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재판 전에 Plea Bargaining(유죄 답변 교섭: 검찰측과 변호인측간의 형량 협상)을 통해 적절한 형량을 구형받도록 타협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과 같이 피고인의 범죄 기록이 없고 공무상 발생한 우발적 사고인 경우, 형량이 아주 낮아지기 때문에 Plea Bargaining에 검찰측보다 변호인측이 오히려 적극적 나서는 경우도 많다.

물론 피고인이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피고인의 과실에 대한 책임 여부가 불확실하거나 피고인에게 귀결될만한 중대한 사안을 검찰측이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을 경우가 해당하며 이런 경우에는 재판에서 유무죄 여부를 가리게 된다. 사망 사건과 살인 사건에서는 간혹 일시적 정신이상(혹은 정신착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과 같은 의학적 사유를 들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번 사건은 군사 훈련이라는 공무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러한 의학적 사유가 그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피고인들이 정상적인 정신 건강 상태를 지닌 군인으로서 훈련에 임하고 있었고 따라서 통신장비의 결함이나 중대장의 안전교육과 같은 진실 규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을 배제하더라도 피해자들의 사망 사고의 원인은 전방 주의 태만과 운전 미숙 등과 같은 비교적 뚜렷한 과실이라고 볼 수 있다. 피의자인 관제병과 운전병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검찰측 증인의 진술이 번복되는 등 재판 진행상 검찰측 기소 내용에 일부 논란이 될 부분도 있었지만 이를 설사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과실치사의 조건을 충족하는 제반 요소가 충분하여 검찰측이 쉽게 유죄평결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사실 미군 검찰측이 이런 유리한 조건 아래서 미군 관제병 전방 주시 의무 태만과 상황 판단 착오 그리고 운전병의 운전 미숙에 대해서 법정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공세를 전개했다면 쉽게 유죄 평결을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이 사망한 장소(피의자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56번 지방 도로 옆)와 사건 정황(충돌 흔적이 없는 점, 피해자들의 시신이 나란히 위치한 점), 사망 시간(오전 10시 45분경), 날씨(30미터 이상 관측 가능할 정도로 시계 양호) 등이 미군 피의자들의 과실이 없었다면 사고가 발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고를 낸 차량은 전차 구난 차량(제식 명칭 M88)으로서 지뢰 제거용 장비(Mine Flow), 구난 장비 등이 상부에 탑재되어 있어 전방 시야가 일반적인 전차나 장갑차에 비하여 대단히 좁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행시 다른 차량에 비해 상당히 저속으로 운행하며, 좁은 시야 문제로 인해서 엄격한 시계 관측 훈련이 병행된다. 즉 Blind Spot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확인하는 훈련이 엄격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두 명의 여중생을 보지 못하고 사고가 났다는 설명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운전병의 변호인측은 사고 당일 훈련 직전에 중대장의 안전 교육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 또한 전차병에 대한 기본 교육 과정과 전차 구난 차량 운전 기본 교육 과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미군 검찰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포기하고 변호인측의 통신장비의 결함이나 두 피고인의 증언의 불일치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 끌려다니면서 재판을 느슨하게 이끌어 나갔다. 거기에다 사건에 중요한 증인들을 참석시키지 않거나 서면 증언만을 허용하는 등 미국내 검찰의 기소 태도와는 사뭇 다른 비상식적인 기소 태도로 일관하였다. 사건의 핵심 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증인과 참고인이 없는 상태에서 검찰은 단순하고 평이한 논거를 가지고 시종일관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재판 자체가 형식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재판의 성격마저 왜곡시킬 여지를 변호인측에게 남겨주었다.


미군 검찰측의 무기력한 태도와는 반대로 피고인측의 변호인들은 적극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하면서 서로 다른 피고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통신 장비의 고장 여부 등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로 배심원단의 관심을 유도하였다. 아울러 배심원들에게 검찰측 논고에 Resonable Doubt(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건 현장 조사 사진과 비디오 자료 등을 적극 제시하며 지엽적인 문제쪽으로 재판의 방향을 왜곡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두 피고인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게 되었다.

이러한 무죄 선고에는 영미법의 특징 중의 하나인 배심원제를 일부 변용한 미군 법원의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이 크게 한몫을 했다. 본래 배심원 제도는 보통 시민에 의한 사실관계에 대한 평결 제도이다. 시민에 의한 평결이란 말의 의미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의 상식이 통용되고 인정되는 법원의 결정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는 ‘보통’ 시민이 아니라 피고인들과 특수 관계에 있는 현역 군인들이 참가하였다는 점에서 정상적인의 의미의 배심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배심제는 피고인과 동일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배심이 구성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재판의 진행의 어려움과 판결의 왜곡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에서도 이러한 왜곡된 제도상의 헛점과 왜곡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전원 현역 군인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은 아무래도 두 피고인에 대해서 동료로서의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이번 재판이 두 명의 피고인과 한국민과의 대결 양상으로 가는 것처럼 일부 미국 지역 언론에 보도되면서, 배심원들은 더욱 두 피고인의 입장에 대해서 더욱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변호인측은 이 점을 활용하여 전방 관측 의무 불이행과 주의 태만, 운전 부주의로 인한 과실치사라는 뚜렷한 과실 혐의를 은폐, 왜곡하고 검찰측의 논점을 흐린 채 통신장비의 이상 유무나 두 여중생의 갓길 보행 여부와 같은 사실확인이 어려운 부분을 집중 부각해서 무죄평결을 이끌어내었다.

원래 미국 사법제도에서의 배심원은 피고인과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very carefully considered”)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재판의 진행 과정 뿐만 아니라 판결 자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서로 유리한 배심원을 얻고자 노력하며 때로는 배심원 구성을 놓고 의견충돌이 빚어져서 재판이 지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영내 군사 재판이라는 이유로 피고인의 사실상 동료(peer group)라고 할 수 있는 현역 군인 7명으로 구성됨으로써 사실상 미국 사법제도상의 배심원 제도의 원칙과 이상을 중대하게 훼손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 재판 제도에 따라 7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되는 점은 이의 제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재판과 같은 민감한 재판의 경우에는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배심원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며, 이는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했다면 더더욱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했을 사안이다.)

SOFA(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 조항 문제로 인해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한미간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SOFA가 개정되지 않으면 한미간의 보다 더 큰 마찰과 갈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인식을 많은 한국민에게 심어주었다. 아울러 한국내 미군에 대해 적용되는 미국식 형사 재판 제도가 가진 여러 가지 불합리한 요소들과 문제점-그 중에서도 미군 검찰의 기소 의지의 문제와 배심원제를 변형한 미군 형사 재판 제도상의 헛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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