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이 대리의 지하철 습격사건

출근 전 새벽 선거운동, '영업보다 쉬웠어요'

등록 2002.12.01 18:23수정 2002.12.0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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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른 두 살의 이훈씨는 서울 명동의 원단 무역업체에 근무하는 4년차 직장인이다. 갓 돌을 넘긴 토끼같은 딸 아이와 3교대 간호사 일로 피곤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정겨운 아내와 영업이 주 업무인지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접대 술자리로 늘 피곤을 느끼는 그이지만 요즘 들어 매일 출근 전,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생겼다.

아직도 주변이 모두 깜깜할 시간인 새벽 5시 40분.

서울 신촌이 집인 그는 직장과 정반대 방향인 신림 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6시 30분, 드디어 신림역에 하차한다. Two Job이 유행이라더니 이 대리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부쩍 나오는 배가 걱정돼 새벽 요가를 시작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지하철에서 영업 실적이라도 올리려는 것일까?

"제 시간에 오셨네요. 바로 시작할까요?"


반갑게 인사를 하는 몇 명의 일행과 만난 그는 곧바로 어깨에 띠를 두르고 씩씩하게 역 안으로 들어가 다시 전철을 탄다. 그리고 노련한 솜씨로 '영업'을 시작한다. 4년차 이 대리만의 노하우로!

"지금 여기 서 있는 저는 정치인도, 대학생도 아닙니다. 명동의 원단 무역업체 4년차 대리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8시면 저도 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겠습니까?"

이른 출근에 졸던 승객들이 화들짝 놀라 눈을 뜬다. 도대체 저 양반이 무슨 물건을 팔려고 저러나?

"제 나이 서른 하나, 4년 동안 직장 다니며 아내와 모은 전 재산이 4천만원짜리 전셋집 한 칸입니다. 그런데 삼성 재벌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씨는 저보다 세 살이 많은데 재산이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취직을 하거나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열차 안의 승객들은 이미 잠이 다 깬 눈치다. 그래서 당신이 팔려는 물건이 뭐냐니까?


"재벌 재산을 서민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부를 독점할 수 없게 법으로 막아야 합니다. 저는 사회당 당원입니다. 당원들이 1만원, 10만원 십시일반 낸 돈을 모아 사회당은 이번 대선에 대통령 후보를 냈습니다. 그 후보는 20억 이상 상속재산을 사회로 환원하자고 외칠 겁니다.

고리사채를 금지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버는 파렴치한 행위도 없애자고 할 겁니다. 저 역시 김영규 대통령 후보의 기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 월급을 쪼개 후원금을 냈습니다.


12월 19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돈 없어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면 사회당, 5번에 투표하십시오."

웃음을 보내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사이를 씩씩하게 지나쳐 다음 차량으로 옮겨가는 일행. 일행의 어깨에 걸린 띠에는 '사회당 5번 김영규'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상기된 얼굴의 이 대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연설을 준비한다.

"대학 다니던 92년에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했었지요. 제주도 백선본에서 보내온 귤을 학교에서 팔아서 기탁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는데 정말 그 때 하루 삼시 세끼 귤만 먹었더랬습니다. 귤은 안 받아도 좋다고 후원금만 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아무리 먹어도 귤이 줄어야 말이죠. 밑에 깔린 박스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는 거 같고 환장하겠더라구요. 지금요? 10년만에 다시 이렇게 '일선'에 서니까 가슴이 뜁니다. 이 정도면 지하철 영업해도 되겠죠?"

지하철로 사당, 신림 사이를 몇 번 왕복하는 사이 시간은 벌써 8시를 넘어섰다. 직장에 지각하기 전에 그도 출근 채비를 마쳐야 한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은 출근길, 남은 기간은 20일, 사회주의자 이 대리의 지하철 '사회당 영업'은 내일도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혹시 주변에서 사회당 어깨띠를 두른 운동원들을 만나면 이렇게 묻지 마세요. "일당 얼마나 받아요?" 사회당 운동원들은 일당은 커녕 모두 자기 돈 내고 몸으로 뛰는 열성 당원, 자원봉사자들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혹시 주변에서 사회당 어깨띠를 두른 운동원들을 만나면 이렇게 묻지 마세요. "일당 얼마나 받아요?" 사회당 운동원들은 일당은 커녕 모두 자기 돈 내고 몸으로 뛰는 열성 당원, 자원봉사자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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