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3.01.28 16:05수정 2003.01.3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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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 일원에 눈이 내렸습니다. 포근하고 푸짐한 눈이 아니라 좀 섭섭하긴 했지만 유난히 눈이 적은 이번 겨울에 이렇게 자그마한 눈이라도 오지게 쏟아지니 그나마 반갑고 기쁘더군요.
토요일엔 이번 설날 가족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을 사보려고 집에서 가까운 대형 할인마트에 갔습니다. 두 시간이나 다리 품을 팔아서 겨우 사긴 샀지만 어디다 내놓을 만한 값지고 푸짐한 선물은 아니었습니다.
처가댁 선물과 어머니 것은 결국 고르지도 못했지요. 형님 셔츠 하나, 매형들 속옷 세트 두벌, 누나들 브로치 둘, 조카녀석 자동차 장난감. 사고 나니 허탈한 마음까지 들더군요.
조카 선물 사려고 들른 장난감 가게에선 18개월 된 딸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원숭이 인형을 보곤 손가락질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가지고 싶다는 딸내미 맘을 모를 리 없건만 아내는 쇼핑카트에 넣을 듯 덥석 인형을 집어드는 나를 보고 눈을 흘깁니다. 그 서슬에 나는 딸아이 품에 그 원숭이 녀석을 한번 안겨만 주고 조심스럽게 제자리로 가져다 놔야 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살만한 게 없지?" 아내는 뾰루퉁한 입으로 다시 한번 매장을 둘러보자 합니다. '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거지' 난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는 말을 꾹꾹 눌러 삼킵니다. 능력 없고 가난한 남편 만나 고생만 하는 어린 아내에게 할말이 따로 있지 그런 농담은 씨알도 안 먹힐 터입니다. 더구나 처가댁 식구들 선물은 따로 하기 보단 과일박스로 대체하자고 우긴 아내에게 말입니다.
물건을 사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명절선물 고르기는 저처럼 돈 못버는 전문지 기자에게는 꿈 같은 일입니다. 내 능력 없음과 주변머리에 한숨만 나옵니다.
내 시무룩한 모습을 눈치라도 챘는지 아내가 지나치게 명랑해졌습니다.
"오빠, 우리 저기서 초밥 먹고 가자. 오늘은 특별히 내가 쏜다."
회와 초밥이라면 아내도 나도 사족을 못쓰는 음식입니다. 먹는 것만큼은 아끼지 말자고 처녀총각 때부터 죽이 맞아온 나와 아내는 이내 장난감 가게에서의 딸내미 처량한 눈빛을 금세 잊어버리고 맙니다.
초밥을 사고는 기분이 좋아 딸기도 한 팩 사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이제 기분이 나아졌어?' 하는 표정으로 날 봅니다. 그러나 나는 짐 바리바리 싸들고 마을버스에 올라탔을 때 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이 초밥이랑 딸기 사지 말고 딸내미 인형이나 안겨줄걸'.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초밥도 맛있고 딸기도 맛이 기가 막혔답니다. 딸내미도 그 원숭이 녀석을 잊어버리고 그저 볼 가득히 딸기를 오물거리며 씩 웃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천사 같은 딸과 보석 같은 아내를 위해 가난한 가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냥 몸으로 때우는 일뿐입니다.
몇 시간 동안 싸고 알찬 물건 고르느라 고생 고생한 아내의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다리가 좀 부었다고 하자 아내는 '그래! 오빠, 내가 원래부터 무 다리야 왜?' 하며 웃음 담긴 눈을 흘깁니다.
딸내미에게 원숭이 인형은 못 사줬지만 원숭이 흉내로 웃겨는 줬습니다. 책도 읽어 주고, 업어도 주니 그새 신나 깔깔거리며 온방을 헤집고 다닙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도 딸처럼, 어린아이들처럼 잇속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팔에 딸내미, 또 한 팔엔 아내, 발그레 상기된 두 여자를 가득 안고 길게 누우니 왕이 된 기분입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가난이 행복에 보템될 일은 없겠지만 가난 또한 행복한 삶의 일부는 될 수 있다고요. 지난 주말 밤 자그마한 눈들이 가득 내리더니 저 먼 산 위에 흰 모자를 씌워 놓았습니다. 행복도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내려오는 것이겠지요.
곧 설날이 다가 옵니다. 꽉 막힐 귀향길이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오늘 아내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이지만 귀금속보다 더 소중하게 가족들의 선물을 포장할 겁니다. 그리고 내일 모레 아내는 내 팔장을 끼고 난 딸을 안고, 부족한 손에 가난한 선물 나눠들고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광주행 버스에 오르겠지요.
어머니, 보기 힘든 형제들, 조카들 얼굴이 저에게는 그 어떤 선물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선물일 것입니다. 올해는 가족들이 좀더 자주 모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가족들 모두 그리고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서민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또 돈 부자, 땅 부자 되기보다는 그저 모두 행복해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올 설에는 행복이 눈처럼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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