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에 대해 다들 말들이 많다. 아마 교육개혁이 필요하다는 데는 다들 동의할 것이라는 점은 굳이 증명을 필요치 않은 일일 것이다. 교육개혁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문제가 복잡해지므로 대학교 개혁과 초, 중등 교육개혁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대학교 개혁은 대학의 구조개혁에 관한 문제들이고 그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지만 초, 중등 교육의 문제는 그 구성원들 중의 중요한 한 축인 학생들이 미성년이라는 점, 그래서 그들의 의견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되기 쉬운 상태이므로 그들을 대리하여 학부모들이 개입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학교 문제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초, 중등 교육개혁에 관한 것이다.
초, 중등 교육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학벌주의의 정점에 있으면서 초, 중등 교육과정을 필연적으로 왜곡시키는 서울대를 폐교하든 학부를 없애든 아무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만 한다는데도 대부분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필요성도 충분히 인식되고 있고 그 방향도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초, 중등 교육이 표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도가 미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동안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제도들이 도입되었음에도 그 제도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보충수업을 폐지하라고도 했고 운영위원회도 도입되었고 했지만 보다시피 무용지물들이다. 여기에는 교육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면서도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학부모들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집단 전체를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의사들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개업해서 월 수천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의사부터 월 150만원에 혹사당하는 수련의들 그리고 봉사를 업으로 삼는 인의협 회원들까지 다양한 의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놈들이라고 지칭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촌지를 받는 교사들이 있는가 하면 박봉을 털어 학생을 돕는 교사들과 참교육을 실천하고자 자기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전교조 교사들도 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쫓겨나는 공무원들이 있는가 하면 박봉에도 불구하고 국가 발전에 헌신하는 공무원들도 있다. 따라서 집단 전체를 지칭하여 비판하기보다는 문제가 되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여 비판을 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들도 모두 같은 학부모들이 아니다. 자신들의 자식들은 SKY로 지칭되는 대학들에 보낼 자신이 있거나 조금만 더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또 다른 극단에는 당장 하루 끼니거리도 해결하기 힘들어서 교육에 대해 아예 관심을 가질 수 없는 학부모들이 있다.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교육에 대해 불만이 많으면서도 그 불만을 자신의 자식들을 다그치는 것으로 해소하는 학부모들이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글에서 비판만이 아니라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학부모들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도 또 한무리로 구분하기는 힘들다. 참교육학부모회처럼 교육개혁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고 대안 교육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그들도 제외되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그 학부모들은 학교나 교사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분개를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항의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보충수업이 문제가 많으니 폐지하자고 할 때 가장 선두에 서서 반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분명 구분되어야 하며 그들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들의 그런 행태는 비판받아야만 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모순되게 행동하는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학벌이 한 개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오랫동안 몸으로 체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인지라 보다 나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식들을 채근하는 것이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전혀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은 신성한 것이라는 관념이 투철하여 교사나 학교의 문제점에 대해 애써 귀를 막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는 존재들이라는 생각 덕분에 좀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이들을 이해는 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비판과 더불어 각성을 촉구해보자. 학부모들은 학생들 자신과 더불어 교육의 소비자들이다. 자신들의 돈을 지불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보다 직접적인 소비자들이다. 교육 소비자들인 학부모들은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거나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교육관 때문에 그런 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교육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이 다른 많은 사회 현상보다 특별히 더 중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이 미래를 책임지기 때문에 중요하다면 현재를 책임지는 정치와 경제는 중요하지 않은가? 미래의 동량인 학생들이 중요하다면 현재를 지탱하고 있는 학부모들 자신은 중요하지 않은가? 교육이 중요하긴 하지만 다른 것들보다 특별히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교육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시민이 ‘경제학 카페’ 257쪽에서 말하기를 “단골 고객들이 언제나 자기네 물건만 산다고 믿는 기업은 소비자를 무시하게 마련이다. 더 좋은 상품을 더 싼값에 공급하려는 노력을 할 리가 없다. 고정 지지층이 언제나 자기네를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는 정당과 정치인은 유권자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좋은 정책을 개발하는 일에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결국 어떤 교육을 행하든 학부모들이 학교와 교사들을 향해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와 교사들은 학부모들을 우습게 보며 자발적으로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도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예 교육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교육 개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뻔하다. 문제는 그 사이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왜 학교나 교사들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느냐고 하면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선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내신에서 불리하거나 학습에 차질이 생기면 결국은 자신들만 손해 아니냐고. 또 학벌구조라든지 학교라는 단체가 한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다양한 능력을 타고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냥 두어도 또는 조금만 거들어 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해도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든 아이들도 분명히 있다.
좋은 사회란 어떤 능력을 타고나든 자신에게 걸맞은 역할이 있고 그것이 인정되는 사회이지 좋은 머리를 타고난 사람들만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을 부여받는 그런 사회는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나 교사들에게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아야 할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해야 한다. 애꿎은 아이들을 들들 볶을 일이 아니고.
학부모들이 자신의 소중한 자식들을 다그치는 대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어도 자식과 부모 사이가 지금처럼 소원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이러한 판단을 가로막는 또 다른 허위 의식이 있다. 부모자식지간은 모든 감정적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그런 관계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만 청소년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라. 결코 그렇지 않다.
또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자신들의 생각에도 부모자식지간은 모든 관계를 초월하는 그런 것인지. “나는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이미 부모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합리화시킨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볼 일이다.
사회의 모순구조를 개혁하고 기득권을 허물어뜨리는 작업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들끼리 연대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연대를 해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은 잘 할 수 있다는 생각과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들 때문에 자신의 자식들만 들들 볶으면서 세상을 한탄하고 있을 뿐이다.
오랜 삶의 지혜인 속담에도 답답한 사람이 샘 판다고 그러지 않았는가. 그러니 학부모들이여 먼저 자신들의 자녀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당신 자식들의 위치가 보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만족할 만한 학습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거든 그들을 들들 볶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자.
그러기 위해 힘을 모아 보자. 세상에는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그런 일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직접 참여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격려해 주고 후원도 해 주면 좀 좋은가.
왜 당신들은 당신들의 소중한 자녀들을 장미반, 잡초반으로 나누고 에어컨이 작동하는 반과 선풍기 밖에 없는 반으로 나누고 서울대 갈 능력이 되는 몇 안되는 아이들을 위해 다수의 아이들이 차별대우 받고 무시당하는 그런 학교나 선생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가.
“우리 아이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라”고. 당신들은 그럴 권리가 있고 아이들은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쥐어짜면 학습 능력은 향상될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서 벗어나시라. 그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학벌구조하에서 그러한 노력들은 당신들의 아이들이 SKY로 지칭되는 대학들에 가지 못하는 한 별다른 의미가 없는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글에서 논하는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다수의 아이들을 자녀로 둔 당신네들은 왜 당신 자녀들을 바보 멍청이 취급하는 학교와 선생들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당신네들도 덩달아서 자녀들을 다그치는가. 그래서 자식들과 소원해지고 자신도 비참해지는 그것이 진정 당신들이 원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학부모들이여 좀 더 당당해지자. 교육 소비자인 당신들이 요구하지 않는 한 교육개혁은 백년하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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