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송금문제 해법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논란이 한창이다.
한나라당은 특검을 통한 국민적 의혹 해소에 무게를 두고 있고, 민주당은 남북관계 경색을 우려해 국회차원의 진상파악에 한정하려는 눈치다. 문제는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동시에 남북관계 경색을 막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김민웅 목사의 의견처럼) 송금문제의 진실을 일정기간 덮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개가 불러올 남북관계 경색을 원하지 않을뿐더러 공개한다고 돈의 최종 쓰임처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어디다 쓸지 모르는 돈을 퍼주었다'는 식의 소모적 논쟁만 키울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이다. 의혹해소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고 한나라당의 압박이 계속 되는 한 '진실규명'의 길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당선자 측도 "실정법 위반이 드러나면 사법처리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대한 압박을 더해가고 있다. 새정부의 개혁정책이 대북송금 문제로 발목잡히는 것을 우려한 탓이다.
대북송금, 법률의 한계·정치의 부재 결과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더라도 사법처리 만큼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송금이유다. '정상회담 구걸용'이든 '현대측 자금송금에 편의를 봐준 것'이든 대북송금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는 점이다. 관계개선을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주사위를 던지는 게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 백 번 낫다. 극단적으로 잃을 것은 F15K 두 대 값이요 얻을 것은 적대관계 종식 아닌가. 이 문제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사실상 남북관계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둘째, 제공과정이다.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사람조차도 과정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곧 산업은행 대출과 대북송금 과정에 법과 제도를 무시한 요소는 없었는지, 자금제공과 관련해 국회와 협의를 하는 등 국민동의 절차를 밟을 수는 없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다.
비정상관계를 정상관계로 돌리는 시점에서 일어난 일을 투명성과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내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획기적 관계개선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는지,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버티고 있는 정치현실에서 정치적 논란과 절차적 흠결 없이 대북송금이 가능했겠는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더구나 현행법을 이유로 실무처리 담당자를 처벌한다면 밑동은 놔둔 채 가지만 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대북송금 과정 중 절차적 문제발생이 불가피했다면 실무자를 탓할 게 아니라 법률의 한계, 정치의 부재를 탓할 일이다. 또한 희생양을 만들어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셋째, 송금결과다. 정상회담 대가라 하더라도 통일의 이정표를 세우고 이산가족 상봉·장관급 회담 개최·경제협력·문화교류의 물꼬를 텄다면 결코 적지 않은 성과다. 테러지원국이라 낙인찍힌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9·11 테러 당시 한반도는 그 어느 국가보다 평온했고, 한반도 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교류의 상징으로 금강산 육로관광길이 열리게 됐다. 최신예 전투기 수 백대보다 더욱 확실한 안보대책 아닌가.
희생양 없는 정치를 바란다
따라서 대북송금의 진실은 사법적 처벌을 전제로 한 특검보다 국회의 입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회 차원의 조사를 통해 밝혀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부재의 책임을 대북송금 관계자 몇몇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야당이 특검을 통한 처벌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과연 대북송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법적 책임을 모면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역사적 책임마저 부인하기는 힘들 터다. 관계개선 움직임에 엇박자를 내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대북송금을 이유로 정상회담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와 같다. 특검과 처벌을 통해 자신들의 미온적 분단극복 움직임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물론 진실규명은 어떠한 형태로든 처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처벌에만 매달려 비밀송금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황을 잊는다면 2000년도 정상회담 직전의 상황처럼 법률의 한계, 정치의 부재 현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국민은 의혹해소도 원하지만 남북관계에 상응하는 성숙한 정치도 원한다. 당리당략으로 희생양을 삼는 정치말고 남북관계 개선에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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