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공포와 굶주림, 그리고 붉은 피내음을 남긴 채 막을 내리고 있다. 어둠 속의 무자비한 폭격과 비명소리, 그리고 죄없는 자들의 죽음. 이런 냉혹한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우리는 가슴 뭉클하면서도 비장함이 감도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천 명의 아랍인들이 미군과 싸우기 위해 포탄이 쏟아지는 이라크로 들어간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당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에 지원한 이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대개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인접국으로 피난가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인접국에 마련된 난민 수용소가 언론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수용소를 채울 피난민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접국의 젊은이들이 미제국주의와의 성전을 벌이기 위해 이라크로 들어갔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라크 출신이 아니라 인근국가의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공화국 수비대가 도주한 후에도 바그다드를 지키며 미군과 싸우고 있다. 병역기피자들의 천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과연 그들은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극히 일부는 그렇게 생각한 지도 모른다. 대다수는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항전하면 아랍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는 게 뭘까? 도대체 아랍의 자존심이란 게 무엇이기에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지키려는 것일까? 차라리 미국의 비위를 맞추면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침략자들의 동맹군으로 참가해 돈벌이나 해볼까 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기억들이 있다. 친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 부귀영화를 버리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떠났던 독립투사들, 독재정권시절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쓰러져간 민주투사들, 광주와 부산. 마창의 민주열사들. 이들 역시 일신의 안위보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자신을 버렸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간 것은 굶주림과 고문, 죽음뿐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한 해방된 조국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그에 비해 친일파와 독재권력에 기생한 자들은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 해오고 있다. 만주에서 독립투사들을 잡으러 다니던 일본군 출신의 친일파가 대통령까지 해먹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이처럼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강자에 빌붙어 살아온 이들, 즉 대세론자들의 세상이었다.
대세를 따르는 자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약자로서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차라리 대세에 영합해서 실리를 찾자는 것이다. 일제시대, 친일파들은 민족자치를 얻어낸다는 명목으로 일제에 협력해 수많은 아들, 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독재정권시절에는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해야 할 언론인과 정치인, 그리고 지식인들은 오히려 권력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기에 급급했다.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지배논리를 만들고, 언론은 독재자를 우상화 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였다. 독재권력에 저항해야 할 야당 정치인들조차 밤과 낮을 바꿔가며 독재자의 수족노릇을 했다. 이게 바로 대세론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처럼 대세론자들이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비열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세를 따르면 얻어먹을 게 많기 때문이다.
대세론은 과거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들의 정신은 확대 재생산해 현재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박정희와 3김 시대 이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지역보스에게 줄서기를 해서 정치에 입문했다. 정당은 후보자의 정치철학이나 능력, 그리고 청렴도는 고려하지 않았고, 후보자 역시 정당의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정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돈이나 충성으로 보스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니 그런 게 왜 필요하겠는가? 철새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목적은 국회에 진출해 부과 권력을 차지하는 것인데 당이 무슨 문제이며 몇 번인들 못 옮길까? 그들에게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죽음 그 자체이다.
최근 국가적인 문제로 비화된 이라크 파병 문제는 또 어떤가? 파병을 주장하는 대세론자들의 논리대로 하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그들과 연합군을 구성해 북한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고, 초강대국 미국이 흘린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 이건 친일파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하면서 내세웠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대세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꿨을 뿐이다. 대세론자들에게 국가의 이익이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는 도구에 불과하다.
개인이나 국가간의 관계에서 실리는 중요한 문제이자 원칙이다. 하지만 실리, 즉 이익만 좇는다면 친구와 국제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심할 경우 친구를 대신해서 싸우거나 희생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친구라고 해서 모두 의리를 지키는 건 아니다. 손해는 멀리하고, 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항상 강자들 주변을 얼씬거리며 그들과의 친분을 내세우지만 정작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도움을 청할 친구가 없다. 그런 자들을 일명 '왕따'라고 하는 것이다.
친구와 국가 간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근본 원칙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면 자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때론 정의의 이름으로, 때론 평화의 이름으로, 때론 국익이란 이름으로 파병을 해야 한다. 반대로 같은 이유로 전쟁을 거부하기도 해야 한다. 구체적인 것은 국제질서와 여론, 그리고 전쟁의 적법성에 따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대세론에 따라 국익만을 도모한다면 결국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의 힘을 빌려 저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우리가 어떤 명분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할 것인가? 남의 불행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고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우리는 이미 '왕따'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세론자들의 논리는 항상 똑 같다. 국익을 위해 강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논리로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꼬리를 내리며 독립투사들을 비난했으며, 독재자에게는 현실론을 내세우며 아부했고, 베트남전 때에는 이라크 전과 똑 같이 국익을 위한 파병을 주장했다. 그들은 항상 강자 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세론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운동권에도 한 때 대세론이 판을 친 적이 있다. 80년대 이후 운동권에는 정치세력건설과 관련한 논란이 많았다. 운동권이 직접 정치조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정치권에 들어가 세력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기존의 정치권이란 DJ와 YS를 중심으로 한 야당을 말하는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DJ를 지칭한다.(YS의 그늘로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 운동권은 비판적지지세력(이후 주도세력이 DJ가 만든 당으로 들어갔다.)과 독자적인 정당을 건설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비판지지자들의 주장은 대세론자들의 논리와 비슷하다. 우리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DJ당(DJ가 만든 당이 여러 개이고, 운동권의 명망가들도 여러 차례 나눠들어갔기 때문에 DJ당이라고 지칭한다.)에 들어가 그들을 변화시켜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당시 운동권은 이들이 대세였고, 상층 명망가들은 대부분 DJ의 그늘로 들어갔다.
문제는 그들이 정치권에 들어간 뒤의 행동이다. 그들은 DJ의 명망과 지역주의에 힘입어 쉽게 여의도로 입성해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행동은 그들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운동권에서 다수이자 대세였던 그들은 정치권에서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동교동계로 지칭되는 DJ의 친위세력과 그 지지세력들의 눈치를 보느라 본분을 잊어버렸다. 다수가 되겠다던 바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대세에 흡수되어 더 이상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독자적 정치조직 건설을 주장하며 민중당을 만들었던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선거를 통한 원내 진출이 무산되자 곧바로 민중당을 해체하고 여당으로 들어갔다. 그들 역시 여의도 입성에는 성공했지만 보수세력의 집결체인 여당에서 소수로 전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운동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대세를 좇아서 정치권으로 흡수되었다.
노무현이라는 운동권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그들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 것이다. 재야출신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노무현의 발목을 잡거나 딴죽걸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부영, 장기표와 더불어 운동권의 핵심 3인방으로 불리던 민주당의 김근태 의원은 고비마다 노무현의 도움을 거부했다. 선거 막판에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밀린다는 이유로 정몽준 후보 중심의 후보단일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이부영, 김문수, 이재오 의원은 도청사건을 빌미로 노무현 죽이기에 앞장섰다. 그들은 정치권을 변화시켜 대세를 장악하기보다는 국회의원직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과거 민주화를 외치던 당당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의정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해마다 시민단체에서 실시하는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에 관한 평가서를 보면 김홍신, 조순형과 같은 비 재야출신 국회의원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지어 재야출신의 상표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소신 부문에 있어서도 앞의 두 의원과 김원웅 의원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민주당 내 신주류로 분류되는 재야출신의 의원들의 활동이 눈에 띄기는 하다. 또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진보적인 의원들이 정치개혁을 위해 시민단체와 협력하고 있다. 분명 이전보다 발전된 모습이다. 하지만 이들의 지난 의정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다.
파병 반대에 대한 대세론자들의 반론도 만만찮다. 원칙만을 내세우다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고 급기야 패망의 길로 들어설지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강대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일본, 이란, 파나마 등이 미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참패를 당했으며, 아르헨티나는 섬 하나 때문에 영국의 공격을 받고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지배권력자에게 반기를 든 정치지도자들도 수없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승만은 김구, 조봉암과 같은 경쟁자들을 거세했으며, 박정희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정치지도자와 재야인사들을 제거했다. 뿐인가? 자칭 민주주의자였던 YS, DJ도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부하들의 정치생명을 짓밟기가 일쑤였다. 이런 면에서는 대세론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민족의 자존심이 무엇이며, 인간의 도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럼 모든 인류의 역사가 항상 강자들에 의해서만 주도되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랜 세월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온 한민족도 수, 당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와 싸워 이기거나 그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곤 했다. 쿠바는 미국의 침략과 수많은 정치, 경제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팔레스타인 역시 수십 년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탱크와 미사일에 맞서 돌멩이와 소총으로 싸우고 있다. 베트남은 근대사 기간 내내 외세에 의해서 짓밟혔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와 같은 강대국도 그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꼬리를 내리며 물러나야만 했다.
반대로 대세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영원할 것 같던 강대국들이 모두 역사의 이름 뒤로 사라졌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로마,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다던 영국과 무적함대의 스페인도 결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한반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중국도 몽골, 만주족에 의해서 지배당하다 결국 무너졌다. 친일파들이 그토록 믿었던 일본제국주의도 한반도에서 불과 36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몽골은 지금 옛 영화가 무색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위세가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꽃은 지기 전에 가장 화려하다는 사실을 되새겨 본다면 최근 미국의 행동은 그들 나름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세론자들은 미국이 무너지면 곧바로 새로운 강대국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지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놀아난 한민족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세론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친일파와 독재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대에는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호의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에 대한 평가는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이광수. 이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권력과 명예를 모두 잃고 친일파와 독재자란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해 민족정기를 흐렸고,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으로 독립투사들을 잡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한 때 국어교과서에 가장 많이 인용되던 이광수의 작품은 그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이젠 이름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 때 대세였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역사적 오명뿐이다.
현실이 대세론에 빌미를 주는 건 사실이다. 때론 살아남기 위해서 강대국과 강자에게 허리를 숙여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 시대적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히려 반대의 입장, 즉 굴욕보다는 당당한 대응이나 협상이 필요할 때도 많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국제법을 무시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것은 인류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추악한 행위이다. 그것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그런 침략자들은 결국 망하게 되며, 또 국제사회가 협력해 망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과연 우리의 조국이 어느 쪽에 서 있는 것일까? 이라크 전쟁 지지를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지는 모르지만 '침략자의 똘마니'라는 오명은 영원히 씻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 근거가 부족한 대세론에 우리의 근현대사가 휘둘린 이유는 무엇일까? 중화사상에 물든 조선시대의 지배층, 을사오적을 시발점으로 한 친일파, 독재자와 그의 추종세력들. 우리의 근현대사는 그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그들이 바로 대세였기 때문이다. 민족자존과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서 철저히 소외되고 배척당했다. 교육 역시 강대국과 독재자, 즉 대세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그들에 순응하는 인간들을 키워왔다. 그 결과 그들의 의도대로 해방정국과 베트남파병, 그리고 이라크 파병과 같은 역사적 고비마다 대한민국은 대세론자들에게 장악당했다.
대세론의 영향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강자들을 향한 줄서기이다. 재벌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자에게 줄대기 위해 임원교체를 일삼고, 고위 공직자들은 고급 정보나 뇌물을 미끼로 자리를 탐한다. 심지어 회사원들조차 학연, 지연과 같은 줄이 없으면 진급이 어려운 실정이다.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촌지 문화 역시 대세론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성공을 위해서는 실력을 기르는 것보다 힘 있는 자에게 충성하는 게 훨씬 더 빠르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언제까지 막을 수만은 없다. 대세론자들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역사의식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젠 국민들도 정치인이나 언론이 말하는 것을 반쯤 걸러서 읽어낼 줄 알고,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라는 것쯤은 눈치 챌 정도가 되었다. 핵문제도 과거처럼 미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드물다. 설사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전쟁 당시처럼 미국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진 않을 것이다.
의식의 변화는 세대교체와 함께 일어나고 있다.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새로운 정치주도세력은 과거처럼 대세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대세론을 거부하며 정치적 변화를 추구한다. 바보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것도 그들의 힘이다. 그들에겐 친일파는 민족반역자이며, 독재자는 민주주의 적이고, 철새정치인은 구태정치의 표본에 불과하다. 그들이 정치세력으로서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한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짓눌러오던 대세추종론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세론자들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고, 또한 뿌리 깊다. 아직은 그들이 대세이며 다만 새로운 정치주역들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을 뿐이다. 변화된 정치 상황에서 향후 대세론자들의 행동은 두 가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끊임없이 대세론을 퍼뜨리며 새로운 세력을 약점을 노릴 것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보여준 단결력, 교장 자살사건을 빌미로 한 전교조에 대한 공격, 노 대통령 측근에 대한 파상공세가 바로 그 예이다. 경제적으로는 재벌들을 중심으로 딴죽걸기가 한 동안 계속될 것이다. 최근 김부겸 의원이 밝힌 것처럼 재벌들은 노 정권을 길들이기 위해 투자와 실적을 고의적으로 낮출 가능성이 높다. 이 전술은 국민의 정부 시절 써 먹은 것으로 DJ는 그들의 기세에 눌려 재벌개혁을 포기해야만 했다.
또 한 가지는 보따리를 싸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이건 추측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다. 최근 우리나라 최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라크전쟁과 핵문제, 그리고 경기 위축과 사스의 공포로 이민 갈 생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들은 이미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대세론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과 행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이라크 파병에 관한 것이다. 파병의 명분은 한반도의 전쟁을 막기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한다는 건데, 솔직히 노대통령 스스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지 궁금하다. 이제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되고, 앞으로는 한반도 핵문제가 전면에 부상될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우리가 한반도 전쟁을 거부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이라크와 한반도는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다 같은 인류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설사 유일초강대국인 미국이 전쟁을 시도한다고 해서 국제사회와 협력 하에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고, 그도 안 되면 침묵이라도 지켰어야 했다. 갑자기 한반도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한국의 대표가 UN에서 어떤 얘기를 할지 궁금해진다.
대세론자들은 노 대통령의 파병 결정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들에겐 베트남파병에 이후 최대의 쾌거였다. 노대통령은 파병을 통해 자신의 반대세력인 보수진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얘기가 북핵 문제로 확대되면 달라진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대세론자들은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의 전쟁으로 결정되면 그대로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반도 전쟁을 반대하는 노대통령이 미국과 국내의 대세론자, 그리고 북한과 국제사회를 동시에 설득시킬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고 예단할 순 없다. 반대로 실패할 수도 있으며, 그것이 현실화되는 순간 한민족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지난 16일 한·일국가대표 평가전에서 보여준 노대통령의 언행이다. 그는 초청자이자 대한축구협회장인 정몽준씨와 나란히 입장했고, 연설 끝부분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두 사람의 화해와 정치적 협력을 강조했다. 언뜻 봐서는 강자가 약자를 포용하는, 우리 정치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사건을 떠올랐다. 아마도 나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바로 노대통령의 후보시절 YS를 만났던 일이다. 당시 상승곡선을 타던 노 후보의 지지율은 그 사건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 후보가 국민의 정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노 후보는 YS와 화해하면 국민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YS를 구태정치인의 표본으로 생각한 국민들이 그와 화해하는 노 후보 역시 같은 부류로 의심한 것이다.
정몽준씨의 정치 역정도 YS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행동은 YS가 3당합당으로 여권에 들어간 것보다 더 한 정치철새의 표본이었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그는 소장파 대세론자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정치철새들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는 노대통령과의 화해를 통해 재기를 노릴 것이며, 그가 뜻을 이루면 결국 노 대통령이 대표적인 대세추종론자를 구원해준 셈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누구일까? 이인제? 김영배? 김원길? 박상천? 국민의 정서와 시대상황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지도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시작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참여정부'에 '국민의 정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면 기우일까?
해방정국과 4.19 혁명, 그리고 80년의 봄. 정치적 격변기마다 이 땅의 주도권은 대세론자들이 장악했다. 이제 또 한 번의 기회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기회란 자주 오지 않으며, 설사 오더라도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오란 법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북핵 문제가 미국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어 전쟁에 일어나면 전세계인들은 이라크보다 몇 배 더 처참한 광경을 한반도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회를 국가와 민족의 중흥으로 이끄느냐, 아니면 패망의 길로 인도하느냐는 대세론자들과의 싸움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온전히 우리 모두의 몫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 동안 이라크 민중의 고통은 외면한 채 망명생활을 즐기던 자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정권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머리 속에 동시에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한반도에 다시는 그런 자들이 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세론과의 단절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미당 서정주를 아직도 민족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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