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까지 다림질한 저녁 즈음에

요즘 힘들어하죠? 우리 지친 남자들을 위하여…

등록 2003.04.30 18:00수정 2003.04.3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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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 와이셔츠의 각을 예리하게 세웠다. 뜨거운 수증기가 빠졌기에 걸어 두려고 장농을 열었다. 버릇처럼 나란히 걸려있는 양복 윗 주머니를 살피고 잠바의 주머니를 만져본다.

빈 주머니구나! 빈 주머니란 신랑의 비상금이 없다는 말이다. 아직까지 신랑의 지갑을 한번도 열어본 적 없고 신랑의 씀씀이를 탓한 적도 없다. 신랑이 먼저 용돈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신랑의 직급도 그러하고 씀씀이 또한 없지 않기에 때가 되면 걱정이 되어서도 먼저 챙겨주는 편이다. 그도 아니면 오늘처럼 주머니를 살펴보아 모르는 척 짐작으로 돈을 몇 만원씩 찔러주곤 한다.

다행이다. 어제 술을 먹고 와서 아침에 역까지 태워 주었다. 3만원을 주었더니 신랑은 부득부득 괜찮다고 하면서 반강제적으로 받아 넣었다.

신랑의 지갑에 얼마가 있건 상관없이 비상금 주머니가 비었다는 건 지갑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몇 만원이라도 챙겨 주었으니 말이다. 비상금으로 인하여 다툼을 해 본적은 한번도 없다.

신랑은 양복 주머니가 비상금을 두는 곳이라고 아예 일러주었다. 비상금의 숱한 유혹 속에서도 얼마가 있나~ 꺼내 본 적도 없다. 일주일에 두 번 다리는 와이셔츠를 넣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요즘 들어서 빈 주머니가 만져질 때가 많다. 빈 주머니가 지금의 경제 상황을 대변이라도 한 듯해서 씁쓸하다.

신랑의 퇴근시간도 엄청 빨라졌다. 지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힘든 상황이다. 무역업에 종사하는 신랑은 한참 때는 자정 전에 퇴근 한 적이 없어서 아이들이 아빠를 보는 건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더 쉬웠을 정도였다.

아이들을 대하는 신랑의 권위적인 모습이 위태위태할 때가 많아서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빨라진 퇴근시간으로 인해 아홉 살 난 아들과 죽이 맞아서 친구처럼 노는 모습을 볼 때 참 감사한 생각이 든다.


어쩔 땐 아들이 신랑처럼 의젓할 때가 있고, 사십이 넘은 신랑이 아홉 살 난 아들 같을 때도 있다. 이렇게 아이들에 대한 신랑의 눈 높이도 내 바라던 대로 낮아지고 있음이 감사하다. 색색깔 크레파스 색깔을 한 셔츠들을 차례로 걸었다. 내 마음도 색색깔 물들고 있는 것 같다.

그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풍족했음에도 늘 딸리던 게 돈이라 이리저리 급전하기에 바빴다. 삶의 가치를 온통 돈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의 지출에 더하여 선한 용도로 씀씀이를 늘렸음에도 김치 항아리(우리집 돈 통)가 나를 애태운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예부터 여자들은 얼마간의 돈을 늘 비상금으로 갖고 살아야 한다는데 내게는 구멍 뚫린 엽전 한 개도 없으니 원…. 그러나 내게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밝고 건강한 아이들이 있으며 지겹도록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신랑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도 않거니와 지금의 내 마음이라면 영혼의 말씀으로만으로도 천년을 살 것 같다. 그 언제쯤 우리 서민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온 천하 상천하지는 푸른 5월을 토해내고 있는데….

대한민국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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