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또 다른 반란 (하)

등록 2003.04.30 22:52수정 2003.05.0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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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빈 소주병과 컵라면통이 구석에서 뒹구는 골방을 기어 나와 찬 물을 머리에 끼얹은 후 다시 어제의 바위를 찾아 든다. 바닷속에 잠수했던 그 갈매기가 물 위를 낮게 날고 있다. 태양을 삼킨 구름들과 회색 빛 모래사장이 대담한 밀어를 나눈다. 바위는 알몸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파도의 애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은 사랑을 야멸차게 버리는 날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뇌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사랑했던 것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린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이들, 까까머리 중학생의 첫사랑, 나를 거쳐간, 아니 내가 거쳐버린 도도한 여자들, 술김에 잠자리를 했던 뒷골목의 창녀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의 일기장. 파도의 부서진 은비늘이 두 발을 깨문다. 잠시 비늘을 털어낸다. 혼이 나갈 때까지 마시던 알코올과 의식불명, 싸구려 국산 담배, 운해(雲海)를 머금은 지리산, 산행 끝의 막걸리와 도토리묵, 샐러리맨의 비애를 도닥거려 주던 바텐더 아가씨, 보푸라기 인 줄무늬 티셔츠, 음색이 죽어버린 기타…… 기타의 울림이 파도소리와 함께 귓가를 때린다. 왜 이것들을 떠올리지? 그래, 오늘은 사랑을 차갑게 차버리는 날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게서 희망을 끊어야 한다. 희망을 붙잡을수록 난 사랑의 노예가 된다. 한 순간만이라도 나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 사랑을 놓음으로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놓자. 놓아버리자. 시꺼먼 그림자가 내 몸을 덮는다.

빈혈의 안색을 한 사내가 내 앞에 서있다. 빨간 줄이 쳐진 원고지를 허리춤에 끼고 내 등뒤에 서있다. 이 바위는 자기만의 것이란다. 난 점유권을 구걸하기 위해 알량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건넨다. 그는 이름없는 시인이다. 모 유명대학을 나와 이곳 저곳 전전하다 자기의 삶은 시인임을 지상과제로 깨닫고는 한 줄의 시라도 더 얻기 위해 이태째 이 바위 위에서 시를 풀어내었단다. 내가 그의 일터를 뺏은 꼴이었다. 사죄의 값으로 나도 시인이 되고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둘러댄다. 그가 건넨 토마토 한 알은 허기진 나에겐 천상의 복숭아보다도 기름지다. 시라는 말에 동질감을 느낀 사내는 나를 자신의 숙박지로 안내한다.

바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허름한 슬라브 지붕의 민박집이 그가 기거하는 곳이다.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는 고양이 눈처럼 광채를 발하는 조그맣고 시커먼 사내와 수줍은 미소를 띠는 동자(童子)가 앉아 있다. 자세히 사내를 들여다본다. 조그맣고 시커먼 사내는 턱 밑에 두 뼘 길이 정도의 수염을 매달고 있고, 의복은 닳고 닳아 듬성등성 해진 것이 기계충을 먹은 머리통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은 범상치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사내에게 절을 한다. 사내는 아니 도인(道人)은 선문답을 원하는지 모른다. 긴장감에 어깨가 굳어온다. 나의 갑작스런 방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도인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드디어 선문답의 시작이로구나. 미움도 사랑도 버리기로 한 마당에 어떤 대답이든 어떠랴. 용기를 낸다. 도시에서 왔습니다. 도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동자에게 손님을 대접하라 이른다. 앞마당에는 오골계 한 마리가 자신의 죽음을 아는지 세 개밖에 없는 발가락으로 연신 신경질적으로 땅바닥을 후벼 파고 있다. 화덕에 가마솥을 올려놓고 닭모가지를 비튼다. 내 모가지가 비틀려지는 환상을 본다. 목덜미가 쭈삣 선다. 오골계의 털은 뻣뻣해서 뽑기가 힘들었다. 힘들게 뽑은 만큼 속살은 포동포동하다. 세 사내와 마주 앉은 이방인은 화합 속의 이단아다. 그들의 대화는 현실과 환상을, 세속과 이상을 넘나들어 내 서걱한 정신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겨우 그들의 대화에 낄 만용을 가져본다. 나도 조금씩 그들에 동화된다. 그들의 담론은 삶과 죽음과 문학과 철학과 우주와 질서와 가치와 편견과 대자연과 사랑과 신과 육욕과 불멸 등, 거침이 없다.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외면하는 결단 앞에서 왜 이들이 등장했을까. 이 토굴 같은 컴컴한 방안에서도 인생의 철리를 깨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이 차가운 바닷가로 숨어 들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후회와 삶에 대한 연민이 조금씩 고개 들며 취한 머리 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속세의 때묻음의 자각에,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부등키며 그들의 토굴을 나선다.

또 다시 밤이 소리없이 왔다. 살 찐 닭고기로 포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기가 진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것 같은 공복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내 갈 길을 막아선 도인과 동자와 시인의 상징을 찾아 취한 의식이지만 잠들지 못한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다 바닷속 깊은 심연으로 추락한다.

넷째 날


머리가 멍하다. 허기는 없다. 띵한 머리나마 아직 내 목 위에 달려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져 이마와 뒤통수를 번갈아 만져본다. 아직 살아있다. 부탄가스 같은 호흡을 하지만 분명 살아 숨쉰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쿵대며 방안을 울린다. 살아야겠다. 나를 이곳으로 내던진 것이 무엇이든 우선 살아야겠다. 어제의 일은 신의 계시다. 창 밖의 햇살이 눈부시다. 투명하게 방 안을 비춰준다. 가자. 돌아가자. 세상에서 도망치는 것은 놓음이 아니라 잡음이다. 놓자. 현실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냄으로써 나를 놓아버리자. 짓눌리고 피 터지고 깨지고 갈라지더라도 부딪치자. 사랑도 미움도 애써 버리려 하지 말고 감싸안음으로 놓아버리자. 눈 앞에 밝은 빛 하나가 휘돌며 멀어진다. 그 빛을 따라 걸어간다.

서울행 버스에 지친 몸을 누인다. 몇 시간 후면 나는 아내가 해주는 더운 밥과 아이들의 입맞춤에 행복해 하며 다시 휴식을 취할 것이다. 권태로운 생활에 타협하고 분별없는 안식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삶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채로, 시체처럼 살아간다는 것의 배후에, 꿈틀거리는 생명을 잉태할 비밀스런 탯줄을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한 지 모른다.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몽환의 바다와 차가운 바람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아서인지도 모른다. 뚜렷한 목표는 없지만 한발 한발 눈 덮인 산골짜기를 올라가듯 그렇게 걸어갈 것이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로 눈이 따갑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세상이 흘려놓은 정액 냄새를 풍기며 더운 바람을 내뿜는다. 넥타이를 끌러본다. 태양 넘어 넘실대는 바다가 몰려온다. 바닷가에 선 그날의 매서운 바람이, 닭기름이 온 몸을 휘감싼다. 탈출하라. 벗어나라.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허공을 돌아 공허하게 메아리치며 사라진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여전히 잘 깎은 기계처럼 찰그락 찰그락 쇳소리를 내며 잘도 굴러간다. 또 다른 반란은 계산기의 숫자로 찍혀 액정 위를 무심히 구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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