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3.04.30 21:49수정 2003.05.0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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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비출 무렵이면 창밖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산자락 쪽으로 난 창을 열면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은 채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내가 사는 곳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 산자락에 사는 학생들은 산중턱을 가로질러 난 오솔길을 지나 학교로 가는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나 있는 도로를 내려갔다가 다시 정문으로 나 있는 도로를 걸어 올라가면 거리도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까, 오솔길은 '지름길'인 셈입니다.
황토로 되어 있고 폭이 2~3미터쯤 되는 오솔길. 나는 저 오솔길을 볼 때마다 작은 위안을 얻곤 합니다. 도로는 물론이고 마당조차 거의 다 포장되어 있는 서울 하늘 아래에서 흙으로 된 길을 눈만 뜨면 볼 수 있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걸을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동안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에 가고, 공부를 마치면 다시 오솔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오솔길은 비가 오면 가지각색의 우산이 일렁이고, 눈이 올 때면 발자욱들이 생겨납니다.
오솔길 주변은 철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봄에는 온갖 새싹들과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아까시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룹니다. 가을에는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었다가 바람에 떨어지고, 겨울에는 눈이 하얗게 쌓입니다.
오솔길 옆 텃밭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두세 평쯤 일궈 씨앗을 뿌리고, 씨앗은 싹을 틔워 누런 땅을 푸르게 만듭니다. 지금 올망졸망한 텃밭에는 배추며 시금치며 무 따위가 제법 자라나 있습니다. 여러가지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텃밭은 마치 개미 나라의 농장과도 같습니다.
나는 오솔길을 걸어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저 학생들은 자기가 날마다 걷고 있는 오솔길이 변해가는 걸 알아차릴까. 오솔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꿈을 갖고 있고 어떤 친구들을 갖고 있을까.
나는 이따금 학생 시절, 그러니까 2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 무렵 나는 양평의 산골 마을에서 살았는데, 날마다 흙먼지 날리는 산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시절 자전거가 생긴 다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산길 옆은 계절마다 오솔길처럼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산은 봄마다 진달래로 벗꽃으로 살구꽃으로 불들었고, 여름마다 푸른 바다같은 울창한 숲으로 되었습니다.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빛갈로 단풍이 물들었고, 겨울이면 발목께까지 눈이 쌓인 눈길을 토끼며 노루가 지나다녔습니다. 그야말로 대자연의 교향곡과도 같은 절경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뿐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온통 '공부'며 '시험'이라는 단어가 들어차 있었던 탓입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생활을 하다가 고향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산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본 고향 산천은 '금강산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해주었습니다. 순간 지나온 학창 시절 참으로 많은 것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채 살았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다 학원이다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옛날의 나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학생들이 오솔길을 걷는 시간만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솔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찔레나무에서 돋아나는 새순도 들여다보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아카시아잎 따기도 했으면 합니다. 줄지어 행진하는 개미랑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나비도 관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솔길 옆에 걸터앉아 친구랑 우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가슴속에 안고 있는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오솔길은 금빛 햇살을 받고 있고, 오솔길 양쪽에서는 나무들이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내일도 학생들은 저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에 갈 것입니다. 나는 내일도 그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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