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태극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

30일부터 국회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특별전시회>

등록 2003.05.29 12:00수정 2003.05.2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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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역사학연구소

"세계에서 모인 한민족이 뜻을 모아 조국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으로 30여일간의 평화적인 독립운동 정신은 국내외에 3백여 주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전 국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 완전하게 조직된 임시정부는 대한의 영원한 자주독립과 국가복지를 우리 자손만대에 누리도록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中)

타임머신을 타고 8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장소는 중국 상해.


당시 지금은 상하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상해, 그곳은 3.1운동 이전에도 이미 3백여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던 곳이다. 이를 테면 여운형과 한진교 등이 주축이 된 신한청년단(新韓靑年黨)과 박은식과 신규식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동제사(同濟社) 등은 일찍부터 조직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3.1운동이 일제에 의해 파괴된 이후 독립 운동가들은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위한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을 절감, 1919년 4월 10일 프랑스 조계에 이동녕과 조소앙, 이광수 등의 인사들이 모인다. 이 모임으로 구성된 것이 3.1운동의 민주주의 이념과 민족자주정신을 이어받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a 이승만이 1942년 뉴욕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에서 개최한 한국독립만찬 파티에서 이용했던 태극기로, 재미동포 김동준씨로부터 기증받아 전시된다.

이승만이 1942년 뉴욕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에서 개최한 한국독립만찬 파티에서 이용했던 태극기로, 재미동포 김동준씨로부터 기증받아 전시된다.

초대 의정원 의장과 부의장으로 각각 이동녕과 손정도를, 국무총리로는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한 임시의정원은,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확정 공포한다. 그들이 프랑스 조계서 모임을 가진 지 5달만인 9월 11일의 일이다.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임시의정원은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 및 감시 역할을 하는 등 적잖은 활동을 했다.

처음으로 열리는 임시의정원 관련 전시회

오는 30일(금)부터 국회 헌정기념관 1층 중앙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6월 9일까지 11일간 계속될 이번 전시회는 국내 최초로 열리는 임시의정원 관련 전시회라는 데 의의가 있는데, 임시의정원의 속기록과 회의록, 임시정부 회계검사보고서, 광복군에 관한 자료 등 희귀한 원본 문서가 일반 국민에게 최초로 공개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임시의정원 의원의 후손들이 소장하던 각종 사진과 서적, 당시 인물의 유품들도 기증받아 전시될 것으로 보인다.

a 고종이 조선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M.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태극과 4괘가 재봉틀 박음질로 되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고종이 조선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M.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태극과 4괘가 재봉틀 박음질로 되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한편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주목받을 유품 중에 '이승만의 태극기'가 있다. 임시의정원으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한 이승만. 이 태극기는 그가 1942년 뉴욕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에서 개최한 한국독립만찬 파티에서 이용했던 것으로, 재미동포 김동준씨로부터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이다.


이 태극기는 가로 1m43cm, 세로 84cm의 두꺼운 광목천 앞뒷면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긴 몸통의 태극과 청색의 4괘를 겹쳐 붙인 것으로, "제작사의 로고를 볼 때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단국대 명예교수 김원모씨가 밝혔다.

수립 80여년만에 공개되는 임시의정원 관련 유품과 70여년만에 한국에 온 이승만의 태극기.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꼭 한번 찾아볼 만한 전시회다. 문의는 02) 788-3806~7로 하면 된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
신채호, 자리를 박차며 안티를 걸다

▲ 신채호, 그는 왜 이승만의 국무총리안에 안티를 걸었을까?
ⓒ역사학연구소
임시의정원 회의 당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자는 데 대한 반대의견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 정도로 분노한 이는 신채호.

“이승만이 적임자라니, 천만부당한 말이다. 이승만이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갉아먹었지만, 이승만 놈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결국 몇 명의 후보를 더 천거한 후에 표결하기로 결정, 여운형이 천거한 안창호와 신석우가 추천한 이동녕 등이 더 후보로 나왔다. 그러나 표결 결과는 당시 상해와 노령, 한성 등 3곳에 있던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의 집정관으로 있던 이승만의 당선.

그런데 왜 신채호는 그렇게 심하게 반발하면서까지 이승만이 국무총리를 맡는 것에 반대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채호는 무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하는 이였으나, 이승만은 강대국과의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자고 주장하던 이였다.

1923년 <조선 혁명 선언>을 통해 신채호는 외교 독립론의 한계를 이렇게 비판한다.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 1장 제 1조가 되며 (중략) 일반 인사의 ‘평화 회의’, ‘국제 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투쟁력을 소산시켜 버리고 (중략) 설사 만약에 외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그 나라의 노예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외교론에 의한 독립이란, 결국 지배 국가를 갑에서 을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채호가 그렇게까지 반발한 이유, 바로 이 같은 인식의 차이에 있지 않을까?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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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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