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복서를 생각하며

하성란의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등록 2003.06.14 13:30수정 2003.06.1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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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 창작과 비평사

처음 가보는 곳이나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대할 때에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왕왕 있다. 이런 현상을 흔히 데자부 현상이라고 한다. 내겐 바로 하성란의 소설들이 그랬다. 물론, 그의 소설이 여느 소설들을 카피한 것처럼 모방의 흔적이 남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성란의 소설은 때로는 매우 무미건조하면서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사물을 설명하는 새로운 문체를 선 보여왔다. 이 문체는 과거 은희경이나 신경숙의 문체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특히 하성란의 것은 날생선이 파닥이는 것처럼 생기가 넘쳐 흐른다.


그렇다고 기존의 여성작가들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겐 꽤나 신선하게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앞에서 설명한 데자부 현상을 느낄 만큼의 현기증을 전해 주었다.

‘극사실주의적’ 소설쓰기의 형식은 하성란의 소설들을 군살없이 단단한 몸을 가진 헝그리 복서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이번 소설집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에서 보여준 ‘말의 경제’적 흐름은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튼실한 개성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작가 하성란은 그의 책 서두에서 ‘자신은 넘어지면서도 꿋꿋이 일어서는 복서의 마음’과 같은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고백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도저한 삶의 다양한 형식들을 매번 현미경 들여다 보듯 관찰하려 든다면 꽤나 피곤한 일이 아니겠는가.

작가 하성란과 그의 작품들

1967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단편 <곰팡이꽃>으로 제 30회 동인문학상, 2000년 단편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제 33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눈물의 이중주>,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이 있다.
그의 고백을 미리 엿보았던 탓일까. 11개의 단편들은 모두 지쳐 축 늘어진 11명의 헝그리 복서를 연상하게 만든다. 먼저 <별무늬의 얼룩>에서는 ‘씨랜드 화재참사’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단편소설이다. 화재로 딸아이를 잃고 망연자실한 인물들의 심리를 추리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뭐란 말인가. 그녀는 반문한다. 과연 이 사건을 잊어가고 있는가.

사건을 반추하는 것만큼 반성의 계기를 주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 그것을 덮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시련은 증폭되고 아픔은 당사자들만의 몫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런 개인들의 이기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표제작인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라는 단편은 조금 독특하다. 여기서의 독특하다는 표현은 단편이 지니고 있는 미학적이고 개성적인 힘을 유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수염>이라는 프랑스 동화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이 단편은 그 원전의 내용만큼이나 잔혹하지는 않더라도 남편의 친구와 남편의 동성애적 행각을 알 길 없는 독자들에게는 강렬한 반전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이 단편에 들어설 때에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제목’이 주는 수수께끼의 열쇠를 단단히 쥐는 일이 될 것이다.


‘푸른수염의 아내’가 ‘푸른수염’이 보지 말라는 방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곳에는 그와 결혼했던 아내들의 시체가 걸려있더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 단편의 내용을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요컨대, 아내가 남편의 비밀스러운 행위를 들여다 보다 들키게 되는 내용 위에 작가만의 상상을 더하여 새로운 재해석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세밀한 내용구성의 방법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독자들을 설득할 수가 있게 된다. 그로기 상태에서도 결코 상대방을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헝그리 복서’만의 공격법.

그 외의 다른 단편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형식 실험군들의 작품들 또한 여러 가지로 재해석할 수 있는 기법들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96년 단편 <풀>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줄곧 삶의 다양한 방식들을 엮어온 작가 하성란의 소설쓰기는 아직 수건을 던지지 않아도 될 만큼 강인하다. 그것이 그의 다음 작품이 더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지음,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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