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막사 같은 텐트들이 정연히 늘어서 있고 코너를 돌자 몇 대의 중고 승용차와 밴 사이로 오랫동안 세워둔 것 같은 먼지를 뒤집어 쓴 대형 트럭 2대가 서 있었다.
꿈파니아에는 비록 중고이기는 하지만 메르세데스 벤츠며 BMW 같은 고급차도 많이 있다고 했었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지금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지만, 뒤쪽으로 연결된 연병장을 연상시키는 넓은 마당에는 리베라의 말대로 캠핑용의 큰 이동식 차량 등 수십 대의 각종 차량을 주차시키고도 남을만한 공간이 보였다.
코레오는 몇 해 전 한국에서의 군 복무시절을 떠올렸다.
'아! 이래서 리베라가 항상 동네라는 말 대신 군대조직을 연상시키는 꿈파니아라는 용어를 썼구나!'
코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하였다.
언덕을 넘어오기 전에 상상했던 참혹한 형상의 거지굴이 아니었다.
들어올 때 지나쳐온 낡고 초라한 바라크 동네에 비하면 여기는 군 막사 같은 큰 텐트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모습이 잘 정돈된 군부대의 영내 같은 모습이었다.
늘어선 막사들 사이를 돌고 돌아 그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코레오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치 군대가 철수하고 난 썰렁한 병영처럼 가는 길에 늘어선 수많은 막사들 근처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지금 자신을 인도하는 몇몇 남자들과 주위에 파리 떼처럼 따라 붙는 여남은 명의 아이들밖에는 이 큰 캠프 안에 사람이라곤 더 이상 없는 듯 기분 나쁘도록 고요했다.
휴지조각들이 바람에 쓸려 다니고 비닐봉지만이 흙먼지에 날릴 뿐, 캠프는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황량하고 조용했다.
막 세 번째 커브를 돌아섰을 때 꼬리가 중간쯤에서 엉성하게 잘려나간 한 마리 늙은 리코노 (Ricono; '멍멍이'정도로 해석되는 집시들이 개를 일컫는 말, 집시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는 경우가 흔함) 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슬렁어슬렁 담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행렬은 피라미드의 형태로 끝이 높고 뾰족한 텐트 앞에서 멈춰 섰다.
일행을 세워 놓고 앞장섰던 남자 혼자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남자들이 그 때까지도 뒤에 따라붙었던 아이들을 손을 저으며 내쫓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호기심이 넘친 눈을 두리번거렸으나, 이내 포기한 듯이 저희들끼리 아까처럼 공차기 놀이라도 하려는지 왁자지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시 공터 쪽으로 몰려갔다.
텐트는 이제까지 지나온 장방형의 엄청나게 커다란 텐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 자수로 제법 화려하게 장식된 좋은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끝이 뾰족한 꼭대기에는 작은 깃발 서너 개가 세찬 바람 때문인지 바람개비처럼 펄럭였다.
그 때 텐트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나오더니 코레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텐트 안은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제법 넓었다. 한쪽으로는 책상과 다른 한쪽으론 조그만 원탁이 놓여 있었는데, 한 사내가 원탁을 다리에 끼고 신문을 펼쳐든 채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코레오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자 사나이는 신문을 원탁위에 던지고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던졌다.
"어서 오시오. 코레오 씨."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내가 듣던 까삐딴이 아닌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코레오는 정확한 이태리 표준말로 또박또박 말하는 안경을 끼고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그만 원탁 앞으로 빛바랜 청바지로 감싸져 있는 그의 가는 다리가 기린처럼 훌쩍 길게 느껴졌다.
"저는 파비오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듣고 있었지만 직접 만날 날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코레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검정색 아르마니 안경 속에서 코레오를 훑어보는 그의 밝고 조그만 갈색 눈동자에는 영민함이 느껴졌다.
'이태리에 와서 이렇게 하얀 사람은 처음 본다!'
그의 창백하도록 수척해 보이는 학자풍의 긴 얼굴에서 오직 눈빛만이 차가운 마그네슘 불빛처럼 냉철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코레오는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그였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는 쫓기는 도망자의 황폐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험악한 곳에까지 오셨군요."
"더 험악한 곳도 갔었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보니 로마가 시끄럽더군요. 집시들이 베네치아 궁을 점령하여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던데 그런 끔찍한 일도 당신이 관여한 것이었나요."
"들었군요. 시작은 내가 계획한 것이 틀림없소만 베네치아 궁에서 일어났던 일은 나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소."
코레오의 질문에 파비오는 고통스러운 듯이 웃었다.
"실망스럽군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처음엔 다만 치르코 맛시모에서 열렸던 반세계화 단체의 시위에 같이 참여해서 세계 경제의 블록화와 강대국의 수탈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가속화로 생긴 국가간이나 개인들 간의 소득불균형 심화를 규탄하고 소외와 핍박으로 벼랑 끝에 몰린 집시들의 생존권을 호소하려던 것뿐이었소. 사실 평화적인 시위로 계획했던 것인데, 일이 이상하게 바뀌어버려……. 그 일을 생각하면 괴로워 죽을 지경이요. 그 때 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없는 사이 일이 그 지경이 되고 만 것 같아서."
"그렇다면 베네치아 궁 난입을 지시한 것은 누구였소? 내가 알기론 까삐딴은 그 무렵에 스페인에서 나에게 쫓기고 있었소"
"그가 여기 없어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바르두라는 심복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은 다하니까요."
코레오는 파비오가 말하는 그 이름을 언젠가 리베라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세계화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당연히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요. 세계화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결과 투쟁을 조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들더라도 꾸준히 인내하며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든 것은 세계화를 주도하는 탐욕스런 다국적 기업과 가진 자들이요. 그들이 대화는커녕 약한 자들의 생존권 따윈 아랑곳없이 계속 밀어 붙이기만 하기 때문이오."
"……."
"집시들이 베네치아 궁을 불법 점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평화적인 시위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만 경찰들의 무리한 진입으로 사람들이 이러 저리 서로 밀리면서 파티장을 장식하고 있었던 촛불들이 넘어져 건물 안에 화재가 일어나자 불길을 피하여 대피하느라 대혼란이 일어나면서 술에 취한 여자들이 두 명이나 깔려 죽었소.
그 통에 집시들도 티라나라는 여인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농성을 부리던 나머지 집시들이 모조리 현장에서 체포되었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바람에 동지들이 억울하게 꼼짝없이 살인과 방화 혐의를 둘러쓰고 중형을 받게 될까봐 정말 걱정이오. 더군다나 죽은 여자들이 강대국 S국의 장관부인과 대사 딸이라서 그 쪽에서 재판 관할권을 넘겨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모양인데."
"사건이 일어난 곳이 여기인데 그건 말도 안 되지요."
"그게 당연하지만 워낙 상대국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또 범인들이 자국민이 아니고 집시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말썽이 나지 않도록 그냥 넘겨주고 말까봐서 걱정입니다."
"듣고 보니 그날 일은 정말 유감이군요. 한데……."
코레오는 말을 끊고 망설였다. 당장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큰일을 눈앞에 두고 걱정하고 있는 파비오의 말허리를 자르고 리베라의 일을 꺼내기가 좀 힘들게 느껴지긴 했지만, 일각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은 리베라의 소식을 알기 위하여 왔습니다."
"리베라의 일은 나도 다만 걱정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때 까삐딴과 함께 떠난 뒤론 나도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왈은 어디 갔나요? 아까 집시들의 말로는 그녀가 여기 없다던데?"
"왈은 얼마 전에 헝가리로 떠나 버렸소. 집시 난동사건 이후 수사가 시작되자 동구나 스페인에서 온 집시들은 까삐딴을 따라갔는지 모두 급히 몸을 숨기고, 남아있던 이태리 토박이 집시들 역시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나폴리로 내려가 버리고 아직 여기 로마에 남아있는 것은 버려두고 떠난 노약자들과 아이들뿐입니다. 여자들도 몇 명 남아 있지만 지금은 시내로 구걸을 나갔소."
"파비오, 왈을 찾아서 헝가리로 가 볼 작정이니 나를 도와주시오."
"리베라를 찾는 것은 그만 단념하시오. 이태리 사람인 나도 갓죠라고 따돌림을 받는데 당신이 집시여인을 찾아서 어떡하겠다는 겁니까?"
"뭐라고요!"
"아니, 내가 말한 뜻은 리베라가 나하고는 그래도 인종적으로 가깝다는 말입니다. 외모에서도 아시겠지만 리베라의 아빠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리베라는 이태리 사람이지만 그녀는 집시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 점은 어쩌면 까삐딴의 말이 맞을 런지도 몰라요."
자신을 쏘아보는 코레오의 서슬에 놀랐는지 파비오가 변명처럼 말했다.
"나도 당신 말처럼 포기했었소. 하지만 리베라가 자의로 간 것이 아니고 납치당한 것을 안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찾는 것을 단념할 수는 없습니다. 파비오, 부탁이니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
"하기사 왈을 만나면 리베라에 대해서 뭔가 알 수는 있겠지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손녀딸의 일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그동안 왈이 리베라의 행방이라든가, 주위사람들에게 일언반구도 수소문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요."
파비오는 동그란 아르마니 안경테 너머로 코레오를 건너다보면서 잠시 사이를 두고 망설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헝가리에 있는 왈의 거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왈이 떠나기 전 왜 나를 불러서 비밀리에 자신의 거처를 알려주었는지 지금까지 늘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당신이 찾아오고 보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하여튼 코레오, 당신이 졸라서 알려주기는 하였소만 찾아간대도 왈이 만나 줄지나 모르겠군요."
"고맙소. 파비오! 리베라 얘기를 들으니 당신이 런던에서부터 늘 그녀를 도와주었다는데, 리베라를 찾으면 당신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소."
코레오는 파비오의 손을 잡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당신들 둘의 관계는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지요. 영국에서부터 그녀를 지켜보았지만 갓죠와의 선을 그으며 냉정하게만 보이던 리베라가 그렇게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 듯이 하는 모습은……. 리베라의 어느 곳에 그런 면이 숨어있었는지 나도 놀랐소."
"당신이 집시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것은, 모두들 눈앞의 이익을 쫓아 바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어려운 입장에 처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나 열정, 그리고 자기 희생정신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당신이 하려는 일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더 이상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소.
까삐딴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지기는커녕 자칫 모두에게 화를 부르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좀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서 다른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다른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요? 그건 당신이 현재 이 세상의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탐욕이 얼마나 게걸스러운 것인지를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할 거요."
파비오는 아르마니 안경을 벗어서 손에 들고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이렇게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진심으로 당신이 좋아져서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었소. 당신이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기를 빌겠습니다."
하고 코레오가 막사를 나설 때,
"잘 가시오."
하고 외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파비오가 싱긋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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