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민나 집시데스 93

헝가리의 피리소리 (4)

등록 2003.07.29 08:48수정 2003.07.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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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코레오는 자동차를 빌려 파비오가 알려준 대로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코레오는 숱한 녹색 산들을 가로 질렀다. 마침 잔뜩 흐려있는 날씨 탓인지 그것은 아주 우울해 보이는 짙은 녹색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자동차로 네 시간쯤이라고 들었는데 중간에서 길을 묻고 헤매느라고 다섯 시간도 더 넘게 달리자 갑자기 산들이 황량한 회색 바위산으로 바뀌어 갈 때쯤, 코레오는 지나쳐온 마을에서 알려준 지명의 길 표지판을 보았다.

지도대로라면 이곳은 루마니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헝가리의 동쪽 끝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산맥도 멀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난 아무런 길 표지도 없는 작은 길로 들어서라고 했었지'하고 생각하며,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접어들어 뱀처럼 굽이굽이 경사 길을 따라 얼마쯤 갔을 때, 코레오는 커브길 아래로 군데군데 황토색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것을 보았다.

왈이 머물고 있다는 산간 마을에 겨우 힘들게 도착한 것이다. 수풀너머 언덕 위에 원두막 같이 끝이 뾰족하게 튀어 오른 크고 작은 텐트들 사이로 군데군데 희고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산을 넘기 전 한 가게 앞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해준 장소가 틀림없었다.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자 언덕 위에서 건너다보였던 마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 봤던 연기를 목표로 겨우 방향을 잡으며 자동차 길인지 오솔길인지 모를 울퉁불퉁한 길을 덜커덩거리며 조금 올라갔을 때 다시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큰나무들이 잇달아 쓰러져 있는 벌목장 옆으로 있는 넓은 공터에는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몇 대 서 있었다.

'다 왔구나! 여기가 그들의 주차장이로구나.'


코레오가 자동차를 세우고 밖으로 걸어 나와 집시 마을을 향하여 조금 걸어갔을 때 요란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먼저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한 떼의 개들이었다.

거친 털을 곤두세우고 눈에서 야생의 맹수에게서 느껴지는 광포함이 느껴지는 것이 개라기보다는 차라리 늑대에 가깝게 보였다.

순간 코레오는 차로 다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 사이에 언제 개들이 달려들지 몰랐다.

집시들의 개들이 분명한데 놓아먹이는 개들이고 보면 덤벼들어 물기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코레오는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생각한 대로 코레오가 앞으로 나서자 개들은 여전히 짖으면서도 뒤로 물러났다가는 코레오가 멈추면 다시 다가 오고는 했다.

그 때 무어라고 외치는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나이들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개들의 위협에서는 일단 벗어났다는 생각에 코레오는 그들이 두렵다기보다도 반가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표정을 감추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집시어로 말했다.

"이태리의 로마에서 와있는 왈을 만나러 왔습니다."

"뭐라고 왈이라고?"

코레오의 느닷없는 집시어에 놀란 듯 패거리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그 중에서 구릿빛의 큰 얼굴과 빗질을 잘 하지 않아서인지 마구 헝클어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나이가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코레오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내들의 대부분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있어 그들의 건장한 어깨와 양팔이 아니면 언뜻 여자처럼 보였다.

코레오가 집시어와 이태리어를 섞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들은 '왈'이란 이름 외에는 코레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듯 자기들끼리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왈을 만나지도 못한다면'하고 코레오가 낙담하는 순간 그 중의 한 사내가 더듬거리는 이태리어로,

"이태리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올 테니 기다려라"하고 말했다.

코레오가 개들과 사내들에게 포위되어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사내가 키가 크고 핼쑥하게 생긴 다른 집시 하나를 데려고 나타났다.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어서 처음에는 나이를 추정하기 힘들었지만 얼굴의 팽팽한 피부나 혈색으로 보아 그가 젊은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코레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사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숱이 많은 눈썹을 이따금씩 찡그리며 얘기를 듣고 있다가 유창한 이태리어로,

"나를 따라오게."

하고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 곳은 집시의 안마당이다. 하지만 왈을 만나러 왔다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여전히 포위된 채 마을로 따라 올라가면서 코레오는 그 이태리어를 할 줄 아는 사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사내는 코레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눈앞의 완만한 언덕을 가리켰다. 언덕에 가까워지면서 음악소리가 들려와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마루턱에 올라서자 모든 이유가 자명해졌다.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공터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거기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정도 내려갔을 때 사내는 코레오를 그 자리에 기다리라 이르고는 넓고 다부져 보이는 등을 보이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코레오가 자세히 살펴보자 무리지어 있는 사내들 속에 여자는 두세 명밖에 안 보였는데, 그 중에 하얀 머리를 두 줄로 길게 땋아서 내린 몸집이 조금 뚱뚱해 보이는 할머니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도 그 노인이 왈이 틀림없어 보였다.

두 갈래로 땋아 내린 흰머리를 묶은 붉은 천조각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금화를 달고 있다고 리베라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 시집 올 때부터 머리에 장식하고 있었던 노바라의 금화 몇 닢은 왈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서 그 누구도 감히 그 금화에만은 손을 못 대고 있다고…….

멀리서 보았을 때는 두 사람의 사내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중의 한 사내가 가진 것은 자세히 보니 바이올린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악기였는데 통이 표주박을 두 쪽으로 갈라 논 형태로 생겼는데 전체적으로는 마치 기타와도 같이 생긴, 바이올린 보다 더 큰 악기였는데 바이올린처럼 활을 가지고 켜는 점이 특이했다.

남자 하나는 일어선 채로 나무로 된 크고 긴 피리를 불고 있었다. 피리를 불던 사나이는 피리에서 입을 떼고는 목에 걸고 있던 작은북을 한손으로 두드리며 이번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들리다 끊어지다 하는 가는 곡조의 노랫소리는 지난날 빌라 보르게세 공원에서 리베라가 부르던 곡조의 풍과 닮아 있었다.

그 때 왈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고, 아까 사나이가 이쪽을 보면서 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코레오가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왈도 몸을 일으켜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기며 두세 명의 사나이가 뒤를 쫓으려 했으나 왈은 손을 저어 막고는 혼자서 자기 키 보다도 큰 가늘고 긴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비틀 걸어왔다.

가까이 오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보며, '저것이 언젠가 리베라가 말해주었던 루푸니 로블리라는 것이군'하고 생각하며 코레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코레오라고 합니다."

마주서서 희미한 웃음을 띠우는 왈을 보며 코레오는 말했다.

왈은 몸집 때문인지 피부는 팽팽해 보였지만, 얼굴에만은 깊은 고랑이 온통 골판지처럼 자글거려서 나이보다 적어도 10년 이상은 더 돼 보이는 것이 도저히 육십이 채 안 되는 나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코레오는 왈이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집시 중에서는 장수하고 있는 편이라고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언뜻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리베라를 연상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비스런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보는 순간 리베라의 눈을 떠올렸다.

그녀들은 눈을 통하여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 쌀레리나의 눈도 이런 것이었던가!

"리베라가 있는 곳을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더니 묻는 말에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조용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군. 들어올 때 봐서 알겠지만 여기는 갓죠가 올 곳이 아니야."

왈의 말투는 뜻밖에도 조금 전의 젊은 사나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정확한 이태리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저는 리베라를 사랑합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어요."

"행복? 우리 리베라를 자네 갓죠의 나라에 데리고 가서 잘 먹이고 잘 입히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것이 갓죠들한테는 행복일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집시에게는 아냐.

리베라는 자기 위치로 갔어. 우리는 갓죠들과 삶에 대한 생각이 다르네. 물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집시의 숙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그 속에서 운명에 순응하며 살 때 행복한 법이라네."

"왈! 리베라는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리베라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납치된 것입니다."

"자네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나?"

왈이 코레오를 노려보자 코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노인의 눈에서 이토록 강렬한 광채가 흘러나올 줄이야.'

그 때 다시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리들이 이쪽에 대한 궁금증을 거두고 다시 자신들의 음악을 즐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가게나.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게나. 그런 부질없는 일들은 다 잊어버려."
왈은 등을 돌려서 가려고 했다.

"할머니 제발, 리베라는 까삐딴에게서 도망쳐서 저랑 살고 싶어 해요. 여기 리베라가 전해 온 쪽지가 있습니다."

코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왈의 팔을 붙잡고는 급히 호주머니에서 글바바가 리베라로부터 전해 받았던 쪽지를 꺼내어 왈에게 내보였다.

"뭐? 리베라가 쓴 쪽지라고!"

왈이 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도 있답니다. 리베라가 납치되기 전에 한번 임신을 비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이가 있다고! 리베라가 자네의 아이를 낳았다고? 그럼?"

편지를 보던 왈은 충격을 받은 듯이 입을 씰룩거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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