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상으로 바위같이 무표정해 보이는 왈의 얼굴에서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가 이는 것이 보였다.
"제발 리베라가 있는 곳을 알려주세요. 리베라를 찾기 위해서라면 저는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코레오는 왈을 붙들고 매달리며 바닥에 무릎을 끊었다.
"손녀 따님은 아직도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제 꿈에서 리베라를 봤네. 아마 자네가 오려고 그랬던 모양이야."
왈이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자네가 리베라를 그토록 봐야겠다면 만날 수밖에 없겠지!"
코레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왈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자신이 기다리던 대답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왈! 감사합니다. 리베라를 찾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내가 허락하고 안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것이 라니마가 정해 놓은 자네들의 운명이라면."
"……."
"언젠가 집시가 이 땅에서 사라질 날이 오겠지. 그리고 나면 갓죠들의 세상도 종말을 맺을 걸세. 라니마 여신은 자기 땅이 오염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거든."
"……."
"리베라는 지금 모로코에 있네."
"어떻게 리베라를 찾아가지요? 왈?"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가서 무스타파라는 사람을 찾아가도록 하게나. 죽은 그링고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절친한 친구이지. 아주 용감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그링고와 함께 로마에 와서 묵다간 일도 있었지. 그링고의 누나인 왈이 보냈다고 하면 틀림없이 자네를 도울 걸세.
자네는 까삐딴이 두렵지 않나? 리베라를 만나려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아닙니다. 리베라와 제 아이를 구하는 일인데 제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갔었던 그라나다의 집시동굴보다 몇 배나 더한 곳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왈 제게 무스타파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알았네. 내가 무스타파의 주소를 적어주겠네. 하나 마침 때가 되었으니 막사로 먼저 돌아가 간단한 요기라도 하면서 기다리고 있게나."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먼 길을 와서 요기도 안하고 그냥 가겠다는 말인가? 주소를 적어주려면 나도 막사로 가야겠지만 걸음이 느리니 시간이 걸릴게야. 저 사람과 먼저 가서 식사를 하고 있게나. 식사가 끝나면 내가 자네를 부름세."
왈은 재촉하는 코레오를 향하여 조용히 웃어 보였다.
슬픔이 어린 듯하였지만 손자사위를 보는 할머니의 인자함이 담긴 미소가 아마 이런 것일까, 코레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왈이 아까 그 사나이를 손짓하여 부르자 그 남자만은 음악에 정신을 팔리지 않고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냉큼 왈의 옆으로 달려왔다.
왈은 사투리인 듯싶은 알아듣기 힘든 집시어로 사나이와 말을 주고받았는데 코레오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맨 나중에 사나이가 대답한
"예. 알겠습니다. 공주님!"
하는 한마디 뿐이었다.
여기서는 여전히 왈이 공주님이라고 불리고 있구나, 생각하며 코레오는 전에 리베라가 말해주었던 왈이 노바라의 마지막 공주였다는 말을 떠올렸다.
사내는 다시 앞장서서 왔던 길로 코레오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사내를 따라서 천막 같은 구조물들을 돌고 돌아 조그만 군 막사 같은 곳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입구에서 좌우로 반씩 나뉘어 한쪽은 사무실 같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학교의 휴게실이나 군 면회소 같이 되어 있어 중앙에 정사각형의 식탁 같기도 하고 카드 놀이대 같기도 한 테이블 및 소박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예의 그 남자가 뭔가 뜨거운 음식물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더니 쟁반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릇 위에 얹혀진 나무로 만들어진 옛날 시골의 가마솥 뚜껑 같은 것을 살며시 옮기니, 뚝배기같이 생긴 우묵한 질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죽이 절반 조금 넘게 차 있었다.
죽 안에 윤기가 도는 쌀의 빛깔하며 뼈 채로 붙어있는 연한 닭고기며 노르스름한 닭 껍질 등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 주시던 것과 똑같이 먹음직스러웠다.
그 밖에는 스푼 하나와 소금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다 끝나자 난생 처음 보는 식혜 빛깔의, 이름은커녕 종류조차 짐작할 수 없는 뜨거운 차 한 잔이 배달되어 왔다.
개운한 입맛의 차를 다 마시고도 한참이 흘러서야 사나이가 다시 들어와 왈이 부른다고 말했다.
왈이 건네주는 단정하게 접혀진 누르스름한 종이를 보며 코레오는 갑자기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헛기침으로 목청을 몇 번이고 가다듬으며 제사 지내실 때 읽으시던 지방문을 떠올렸다.
"왈, 이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지요?"
글자는 한 자 한 자 단정하게 써 있었는데 알파벳의 철자를 앞뒤 위아래로 마구 뒤섞어 놓은 듯하였다. 언뜻 보았을 때 라틴어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아랍어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질문은 하지 말게. 그곳에 가면 어차피 답을 얻게 될 테니까."
왈의 말에 코레오는 움찔했으나 그래도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래위로 두 줄로 써 있는데 적어도 어느 것이 이름이고 어느 것이 주소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주소일세. 거기에 이름은 없네. 아주 긴 이름을 갖고 있는 노인이라서 나도 그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라곤의 사자(獅子) 무스타파라고 말하면 거기선 누구나 다 알거라는 사실일세. 카사블랑카에 도착해서 그 주소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
"자네는 리베라를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자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부탁이 있네만 만나거든 잊지 말고 꼭 이 말을 전해주게. 부모의 마음은 항상 자식이 있는 곳에 머문다고. 잊지 말고 전하게. 그리고 그 말은 리베라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코레오는 노인이 하는 말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로코라면 주소가 아랍어로 씌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전에 글바바가 모로코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주소는 뭔가 다른 언어로 쓰인 것일까? 그래, 왈도 그대로 베껴 쓴 것일지도. 어쨌거나 갖고 가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지금은 왈이 시키는 대로 해 볼 수밖에.'
마음 속에는 많은 의문들이 오고 갔지만 더 이상 왈에게 질문을 할 수도, 달리 방법도 없음을 코레오는 느꼈다.
흘낏 왈의 동정을 살폈을 때 코레오는 왈의 눈동자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혹시 왈이 외동손녀가 사라지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큰 쇼크를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왈의 눈빛이 초점을 잃은 듯이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도 같았다.
왈은 코레오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에 걸린 선반으로 다가서더니 어린아이 주먹만한 돌 한 개와 쇠막대기 하나를 내리더니 코레오를 향하여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이지요?"
"내가 자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일세. 부시와 부싯돌이야.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산에서 불을 피울 때 사용했었지. 이렇게 먼 길을 힘들게 찾아왔는데 달리 줄 만한 물건이 없구먼."
"……."
"내가 조금 전에 준 주소가 적힌 종이는 무스타파를 찾고 나면 없애 버리게. 옛날 집시들이 했던 것처럼 부시로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태워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이 부시와 부싯돌은 자네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면 좋겠네. 세상엔 때로는 하찮아 보이는 작은 물건들이 운명을 이끌어 가기도 하니까."
왈은 천천히 다가와 코레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코레오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깊은 절망과 슬픔으로 피폐해진 듯한 눈동자는 코레오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희망을 잃고 어둠 속을 방황하던 횃불이 우연히 찾던 목적물을 비추었을 때처럼 환하게 불타올랐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높이 올렸을 때처럼…….
그리고는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오는 듯이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 감고 무너질 듯 서 있었다.
그런 왈이 갑자기 애처롭게 느껴져서 코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왈을 살며시 가슴에 안았다. 뚱뚱해 보이는 왈은 의외로 작은 여인이었다.
코레오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리베라의 할머니라고 생각하니 집시의 공주가 아니라 돌아가신 자신의 할머니 같이 정겹게 느껴졌다.
코레오가 살며시 그녀를 품안에서 놓자, 왈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코레오를 한동안 바라 본 뒤에 천천히 말했다.
"그럼 잘 가게. 이제 집시의 세상은 끝났어. 집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거야. 언젠가는 모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떠나라는 왈의 위엄 있는 눈길에 등을 떼밀리는 기분으로 쭈삣거리며 코레오가 걸어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 사내가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어 내용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코레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따라오라는 몸짓을 해보이곤 아까처럼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내의 안내를 받아서 코레오는 다시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사내와 헤어져서 한동안 걸어 내려오다가 언덕을 올려다보았을 때 사내는 코레오가 떠나는 것을 감시나 하려는 듯이 그 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 산등성이의 길을 되돌아 나오고 있을 때, 산이 깊어서인지 골짜기를 타고 안개 같은 것이 밀려들면서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코레오는 어렸을 때 닭을 잡아본 적이 있었다.
코레오가 기억하는 한 그가 죽여 본 가장 큰 생물이었다. 더 철이 없었던 개구쟁이 시절에는 개구리를 돌로 쳐서 사지를 떨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껴본 일이 딱 한번 있기는 했지만…….
코레오를 겁쟁이라고 놀려대던 악동들에게 자신도 그들처럼 사내다운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치기와 죽어가는 약한 생명에 대한 자책감과 후회의 심정이 뒤죽박죽된 그런 개운치 않은 감정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코레오가 어느 날 닭과의 처절한 투쟁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은 마침 어머니가 할아버지가 출타중이신 것을 모르고 산 닭을 사 오셨던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정육점에서 사오는 죽은 닭을 싫어하셨다.
닭을 저녁상에 올려야 하셨던 어머니는 뜨거운 물을 한 솥 가득 끓여 놓으시고는 막상 닭을 잡을 용기가 안 나서 물이 식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계셨었다.
코레오는 출타중인 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늦게까지 저녁을 기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닭과의 투쟁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코레오는 막 중학교에 입학했던 때여서 몇 번이나 새끼줄에 묶인 닭 근처에 주저주저 다가섰다가 닭의 요란한 날개 짓에 뒤로 물러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어머니를 못 본 채 계집아이처럼 물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중에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놔두라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코레오는 닭을 들고 뒤꼍으로 갔다.
전에 할아버지가 하시던 것을 흉내내서 한손으로 날갯죽지를 뒤로 모아서 움켜쥐고 다른 한손의 가운데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뒤에서부터 닭의 목을 감아쥐었다.
닭의 목 힘줄이 손아래서 미끈미끈 요동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몇 번이나 놓고 달아날 뻔했으나, 코레오는 필사적으로 닭의 목을 거머쥐고 매달렸다.
손가락이 마비가 와서 경련을 일으킬 때쯤에서야 닭은 두발을 뻗으며 무겁게 축 늘어졌다.
무슨 생명이 이리도 끈질기담! 닭을 바닥에 내던지고 코레오는 닭똥으로 더렵혀진 신발을 내려다보며 짜증을 내었다.
그리고 털을 뽑고 닭의 배를 갈랐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안 좋은 느낌을 참으며 땀을 뻘뻘 흘리다가 닭의 딱딱한 가슴뼈에 칼을 미끄러뜨리면서 자신의 손가락에도 생채기를 내어 피를 흘리고서야 놈의 뱃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그 때 코레오의 뇌리에 와 박혀서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것이 닭의 뱃속에서 커가고 있는 무수한 알들이었다.
거의 식탁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알부터 시작하여 노란 콩알 같이 작은 것까지 갖가지 크기의 알들이 감자 넝쿨의 감자처럼 피타래 속에서 얼기설기 매달려 있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지금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면 마치 그런 모습일까?
소중한 리베라가 나의 곁에 있었을 때 나는 그런 갓죠들의 온갖 욕망들로 주렁주렁 머릿속이 꽉 차서 가엾은 리베라에게 상처를 주며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아가야! 조금만 기다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엄마를 악마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어 주마."
코레오는 다시금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닭의 뱃속으로 섞여드는 것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던 그 때와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며 이를 악물고 액셀러레이터를 힘 있게 밟았다.
코레오는 리베라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아, 코레오는 지금 리베라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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