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첫날부터 코레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리에 가득한 아랍어를 보고 불안해진 코레오는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서둘러 주소를 갖고 프런트로 쫓아 내려갔지만, 코레오가 건네준 주소가 적힌 종이를 보면서 프런트의 종업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뿐이었다.
"그럼 혹시 여기서 쓰이는 다른 언어의 하나가 아닐까요? 이를 테면 무어어라든가요?"
"아니요. 이건 무어어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쓰이는 언어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글씨인지 알 수가 없군요."
전에 글바바로부터 들었던, 모로코에는 무어인이 많이 산다는 얘기를 떠올리고, '그래 맞아! 그 무스타파인가 하는 사람이 무어인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리듯 물어보았던 코레오는 그의 대답에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혹시 알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안에 가서 물어보고 나올 테니까."
너무나 낙담해 하는 코레오의 모습이 안돼 보였던지 프런트 종업원은 종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있는 주소가 아니야. 이것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네."
호텔의 주인인지 알 수 없지만, 잠시 후 나타난 학자풍의 늙수그레한 영감이 말했다. 이럴 수가! 자신도 헝가리에서 왈로부터 처음 주소를 받았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왈은 이런 주소를 내게 넘겨준 것이었을까?
그 때 한 가닥 빛줄기 같은 생각이 코레오의 머리를 쳤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리베라가 그링고 할아버지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링고라는 별명은 그리스어를 쓰는 집시들을 스페인에서 일컫는 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린시절 그리스에서 같이 자란 왈도 당연히 그리스어를 할 줄 알 테고, 그렇다면 주소를 발음나는 대로 그리스어로 옮겨 적은 것일 수도 있어. 왈이 아랍어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영감님. 그럼, 이 그리스어를 소리나는 대로 읽으실 수 있겠지요?"
"그럼, 읽을 수 있다마다."
영감은 뽐내듯이 큰소리로 몇 번이고 들려주었다.
"그와 똑같은 발음의 거리가 이 카사블랑카에 있지 않은가요?"
"글쎄, 아니야. 이런 이름의 거리는 없네."
영감은 한참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영감님. 혹시 비슷한 발음의 거리 이름이라도."
"내가 알기론 비슷한 것도 없네. 그야 모르지. 내가 이 곳에서 태어나 살아 온 토박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카사블랑카의 거리 이름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정히 그렇다면 관광안내소에 찾아가서 물어 보게나."
"이를 어쩌지요? 이 주소를 가지고, 아라곤의 사자 무스타파라고 하면 다 안다고 했는데…."
코레오는 절망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뭐라고? 아라곤의 사자라고 했나?"
영감이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그럼, '아라곤의 사자 무스타파'를 아십니까?"
"아, 아닐세. 이상한 말이라서 그랬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네."
당황한 듯한 표정의 영감은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무스타파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어디 무스타파가 한두 명이라야 말이지. 여기서 그런 이름은 흔하디흔한 이름일세."
그저 리베라를 찾을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황급하게 이 카사블랑카로 날아 오고 만 자신이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왜 헝가리에서 왈에게 주소를 받고 의문이 일었을 때 끝까지 따져 묻지를 못했던가, 코레오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호텔방에 앉아서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코레오는,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고 주소 종이를 들고 시내로 나섰다.
"이 주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나는 무스타파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코레오는 '분명한 것은 아라곤의 사자 무스타파라고 말하면 거기선 누구나 다 알 거라는 사실일세'라던 왈의 말에 의지하며, 프런트 종업원으로부터 배운 두 가지 아랍어로 만나는 사람마다 묻고 돌아다녔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코레오는 그렇게라도 해 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주소도 주소지만 무스타파라는 이름은 또 뭔가?'
무스타파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을 찾으려니, 호텔 영감의 말대로 거리엔 웬 무스타파가 그리도 많은지!
호텔 영감으로부터 발음나는 대로 들은 거리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그 사람을 안다면서 엉뚱한 사람에게 데리고 가는가 하면, 어떤 때는 일부러 주소종이까지 달래서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아라곤의 사자'라는 별명을 얘기하면 호텔 영감이 그랬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달아나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묻고 다녔지만 말짱 허사였다. 아니, 그것은 처음부터 모로코에서 쓰이는 아랍어나 불어로 된 주소가 아니었던 만큼 카사블랑카의 어디에도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 다음날도 코레오가 피곤에 지쳐 저녁도 안 먹은 채 호텔방에 누워있을 때, 호텔 종업원으로부터 누군가가 찾아와서 로비에서 기다린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찾는다는 것이 자네인가?"
코레오가 의혹에 가득 찬 심정으로 로비에 내려갔을 때, 한 노인이 광채가 번뜩이는 눈으로 쏘아 보며 유창한 스페인어로 물어 왔다.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코레오는 감격해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렇게도 찾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왈 보다 10년 이상 나이가 많다고 해서 70대 중반쯤의 노인만을 연상하고 있던 코레오의 눈앞에는 잘해야 육십이 갓 넘었을까 싶을 정도의 혈색이 소년처럼 붉고 팔뚝이 단단해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이 아라곤의 사자, 무스타파군요!"
그 옛날 전설속의 엘 시드(원래 천성이 사납고 잔학무도하였으나 혁혁한 무훈으로 중세 기사도의 화신과 같은 존재. 옛날부터 시가나 전설의 주인공으로 전해 내려오는 11세기 무렵에 활약했다는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와 같이 위압적인 자세로 당당히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면서 코레오는 외쳤다.
생각치도 않게 말이 너무 크게 나와 버려서 자신의 귓전을 때리는 것을 코레오는 느꼈다.
"그렇소. 당신이 찾아 돌아다니는 무스타파가 바로 나요.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목메어 찾아다니는 것이오?"
노인의 말은 어느새 코레오처럼 이태리어로 바뀌어 있었다.
"영감님께서 그걸 어떻게?"
"당신이 도착해서 처음 내 이름을 말하며 찾아다녔을 때부터 사람을 붙여서 당신을 미행하고 있었소."
"예?"
"어서 나를 찾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겠나! 나는 바쁜 사람이오."
노인의 명령에는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로마 꿈파니아의 왈이 찾아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로마의 왈이라고?"
"예. 그링고의 누나인…."
"아! 그링고. 진작 집시가 보냈다고 말할 것이지. 그런데 집시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오랜만에 이렇게 소식을 보내오다니."
코레오는 무스타파에게 자리를 권유하고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무스타파에게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무스타파는 그링고가 죽었다는 말에 탄식하기도 하며 또한 리베라의 납치를 말할 때쯤은 흥분하여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였다.
"여자를 납치하여 이곳에 와 있다고? 아니, 집시 중에도 그런 나쁜 놈이 있었나. 마약거래에다가 이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놈들이 여기까지….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 버려야지. 그러지 않아도 요즘 이 동네가 이런저런 사건들로 어수선한데 집시들까지 문제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지."
"……."
"그래서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여기까지 찾아든 것이군. 그렇지. 세상에서 사랑의 힘만큼 더 강하고 위대한 것은 없지. 암 두려울 것이 없고 말고. 하지만 갓죠가 집시여인을 사랑하다니 좀 특이하긴 하군. 나 말고도 집시를 좋아하는 갓죠가 있었다니…. 다들 집시를 더러운 동물 보듯이 하지. 그들이 얼마나 정이 많고 재미있는 좋은 친구들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링고는 그 중에서도 내가 동생처럼 아끼던 사람이었지.
그는 정말로 여행을 좋아해서 이곳에도 여러 번 왔다 갔었지. 그링고 그 친구 덕에 나도 젊었을 때 한번은 그와 어울려서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로마에 들른 적이 있었지만. 그럼, 리베라라는 아가씨는 그 때 내가 봤던 그 예쁜 아가씨의 딸이겠구먼. 아무 걱정 말게. 내가 이런저런 일로 늘 바쁜 몸이라서 웬만한 일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이번 일만은 특별히 도와줌세."
무스타파는 자신이 로마에 들렀었던 것은 리베라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고 말했다.
"까삐딴이 있는 곳을 빨리 알아내는 일이 시급합니다."
코레오는 모로코란 나라가 너무나 커서 웅크리고 숨어 있을 까삐딴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하며 말했다.
"자네는 그냥 편안히 쉬고만 있게나. 애들을 풀어서 당장 까삐딴을 잡아들이고 말겠네."
"아니, 그러다가 놈이 혹시라도 리베라를 해칠지 모르니, 있는 곳만 수소문해 주시면 제가 먼저 협상을 해 보겠습니다."
"그럼 그러지. 어쨌든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게나. 내가 바로 조치를 취할 테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무스타파."
코레오는 벼랑 끝에서 밧줄을 잡은 심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무스타파는 많아도 '아라곤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것은 그 노인밖에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러나 그의 용맹성과 잔인함,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의 위세 때문에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가르쳐 주기를 두려워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아랍세력이 스페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때 사라고사에 일족을 이뤘던 유명한 가문의 후손으로, 그래서 그를 말할 때는 으레 '아라곤의 사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많고 많은 무스타파 중에 바로 그 무스타파였던 것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