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밈 (21회)

증거(7)

등록 2003.08.01 09:55수정 2003.08.0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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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는 그의 방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자주 바라보곤 했다.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인터폰을 눌렀다.

"아직 소식이 없는 거야?"
"방금 도착하셨다는 연락입니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단정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비서가 사내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되었어? 회장님은 병명은 밝혀졌나?"
"정확한 병명은 간질증상이라고 합니다."
"간질? 그럼 그 발작증상이 간질 때문에?"
"네."

"깨어나실 가망은 없는 건가?"
"아직 단정할 순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병원은 통제를 잘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만 한다. 이 일은 우리가 계획한 일정에 맞추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비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검은 안경을 벗었다. 그는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두덩이가 푹 패여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두드리면서 말했다.

"의식이 아주 없으신 건가?"
"가끔 깨어나실 때가 있지만 의식이 돌아왔는지는 확인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럼 그곳에 대해선 언급하시지 않았나?"
"그곳이라면?"
비서의 눈초리가 단박에 올라갔다. 남자가 황급히 대답했다.
"네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내가 너무 여유를 부리고 말았어. 진작에 그곳의 위치를 알아냈어야 하는데. 그럼 노인네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곳을 알기 힘들다는 말인가?"
"제가 의사에게 연락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지독한 안개로군"라고 말하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숨을 멈추고 가만히 바깥의 안개를 응시했다. 광화문 뒤쪽의 경북궁이 안개에 쌓여 추녀 끝만 아스라하게 보였다. 그는 다시 검은 안경을 썼다.

"전국의 대여금고 현황은 파악했나?"
"네 1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쪽에 모두 사람을 붙여 놓았겠지?"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워낙 금고의 수가 많아서…"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다가 다시 말했다.
"설사 사람을 붙여 놓았다해도 모든 출입자를 확인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파악되지 않은 사설 금고도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비서는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왼쪽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비행기를 통해 김해공항에 도착한 진수는 사건현장에 바로 가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허전함으로 가득했다. 김 기자를 통해 광고사무실에 다녀온 보고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살해된 여자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전해왔다.

진수는 문득 양파껍질을 떠올렸다. 벗겨도 벗겨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양파. 한층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다시 멀어져 갔다. 조직적인 개입이 없이는 한 사람의 신분을 이렇게 철저히 감추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범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아득했다.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였다. 막막했다.

진수는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 근처, 바닷가로 향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서 바닷가에는 어둠이 먹물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그 색깔과 형태들이 흐릿해지면서 하늘 밑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앞 먹장처럼 어두워진 바다 옆으로 긴 등을 드러낸 포구가 보였다.

녹이 슨 마스터에 주저앉은 진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방파제가 보이는 곳까지 뻗은 콘크리트 도로 위에 희미한 영상이 나타났다.

윤희였다.
그녀와 함께 거닐었던 바닷가 풍경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칼날 조각같은 바람이 파도의 포말과 함께 몰려왔다. 윤희는 그 바람을 맞으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진수는 그녀의 옷깃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지켜보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떴다.

바다는 변합 없는 풍견으로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윤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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