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민나 집시데스 97

모래 열풍 속의 차도르의 여신 (3)

등록 2003.08.04 03:59수정 2003.08.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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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물결모양의 사막위로 한낮을 지난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찔렀다.

차양언저리로 노란색 그물무늬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며 코레오는 밀짚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 썼다.


바람이 거세게 불자 모래가루가 타작마당 같이 휘날리는 사이로 쟁기질 한 밭이랑 같은 모래 언덕이 황금빛으로 출렁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하얀 집들을 다 가져다 모아 놓은 듯한 카사블랑카를 떠나 이리로 오는 내내, 이따금 지나치게 되는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온통 백색과 황금색뿐이었다.

얼마쯤이나 더 갔을까! 안내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서 낙타의 혹 언저리 너머로 녹색의 숲 그림자가 신기루같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저기가 리베라와 만나기로 약속한 작은 오아시스 마을인가? 이 사막 한가운데의 저 외딴 작은 촌락에서 정말 리베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코레오는 꿈에도 그리던 리베라를 마침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걸음에 닿았으면 좋으련만.'

코레오의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오아시스는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멀기만 했다.


그라나다에서 편지에 썼던 나의 아기도 같이 데리고 나왔을까? 정말 아기가…. 모로코의 자벵구리 근교의 한 오아시스 마을에서 그동안 오랫동안 찾아 헤맨 끝에 헤어진 지 일년도 훨씬 넘은 지금, 자나 깨나 늘 그리던 리베라를 드디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코레오는 마음이 미칠 것만 같이 급해졌다.

"리베라!"
"……."

코레오는 검은색 차도르에 둘러싸인 눈앞의 여인을 보면서 정말 리베라인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코레오는 와락 달려들며 외쳤다.

"리베라! 리베라 맞지!"

온몸을 칭칭 두르고 있는 헐렁한 옷에 겨우 눈만을 내놓은 모습은 영락없는 아랍여인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나 빠끔히 뚫린 천 사이로 비록 눈만이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의 동요로 심하게 흔들리는 듯한 갈색 눈동자는 분명 리베라였다.

"저리 비키세요!"
"왜 그래? 리베라! 아무 염려하지 말아. 까삐딴의 부하가 숨어서 지켜보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를 보호하려고 나를 따라온 사람들도 있으니 안심해. 비록 몇 명 안 되지만 세력이 당당한 무스타파라는 사람이 뒤에 있으니 까삐딴도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녀석이 이렇게 리베라를 내보내준 것이 아니겠어?"

후다닥 뒤로 물러서는 리베라의 의외의 행동에 놀라며 코레오는 리베라를 안심시키려고 서둘러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당신의 복장은? 리베라 정말 보고 싶었어. 얼굴을 보여줘."
"안돼요. 저리 물러서세요."

리베라가 여전히 매정하게 외치며 자신의 손길을 뿌리치는 바람에 코레오는 흠칫 놀라며 이상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여자가 아니에요. 여기서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요."
"다른 남자!"

코레오는 손을 그대로 앞으로 뻗은 채 놀란 듯이 멈춰 서서 신음하듯 말했다.

"그래요. 저는 여기서 까삐딴과 살고 있어요. 이젠 옛날의 리베라가 아니에요."

'아! 얼마나 그리던 사람인가. 그런 그녀가 지금.'

차갑게 쏘아붙이는 리베라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코레오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럼 그라나다에서의 편지는? 우리의 아이는?

"리베라! 어서 여기를 도망칩시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는 어디 있지?"
"제가 왜 가겠어요. 까삐딴이 제 남편이고 여기가 제가 있을 곳인데요. 당신 말대로 까삐딴이 나를 감금하고 있다면 그가 당신을 만나도록 나를 내보내기나 하겠어요?"

"뭐라고? 그럼 왜 만나자고 했지?"
"쓸데없이 다치기 전에 당신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예요. 그래도 한때나마 정을 두고 살았던 옛정을 생각해서 당신이 개죽음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요. 모두가 옛날 얘기니 쓸데없는 짓은 이제 그만 두고 여기를 떠나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를 못살게 굴지 마세요. 당신이 이러면 괜히 까삐딴의 부아를 돋워서 잘 살고 있는 나를 괴롭힐 뿐이니까요."

"리베라! 그럼 편지는? 나를 사랑한다고, 우리들의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겠다고 썼잖아."
"그것은 다 거짓말이었어요. 처음부터 당신의 아이 따위는 없었어요."
"뭐라고? 아니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말을? 당신이 납치되기 전에도 아이 얘기를 나한테 비친 적이 있었잖아. 만약에 아이를 임신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코레오는 어이가 없어서 리베라를 쳐다보았다.

"그 때 그 집시에게 그렇게 둘러댄 이유는 저를 죽일까봐 겁나서였어요. 그가 탈옥의 비밀을 말한 이상 바로 따라나서라는 그의 말을 거역하면 자신이 글바바를 돕는 것이 탄로날까봐 저를 죽여 버릴 기세였거든요.

그래서 그를 속여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즉석에서 그럴싸하게 아기의 일을 꾸며냈던 것이었어요. 섣불리 다른 이유를 댔다가는 무사히 그 자리를 넘기지 못하고 그자의 칼에 맞아 죽을까봐서 겁이 났던 거였어요. 집시는 원래 잔꾀가 많고 교활한 것을 이제 알았나요? 어리석은 바보 같으니라고! 진짜로 제가 도망치고 싶었다면 왜 제가 까삐딴을 따라서 거기를 떠났겠어요? 글바바와 함께 얼마든지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뭐, 뭐라고?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지금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나를 속이려는 거야. 그렇지. 말해봐, 리베라!"

코레오는 미칠 듯한 심정이 되어 외쳤다.

"바보같이 굴지 말고 어서 가세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까삐딴의 아이를 낳고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옛날 일로 당신이 자꾸 나를 귀찮게 쫓아다니는 통에 까삐딴이 질투심으로 부아를 일으켜서 저를 죽일지도 몰라요. 이제는 제발 저를 잘 살게 내버려 두세요."
"……."

"아이문제는 지금이야말로 까삐딴의 아이가 제 뱃속에서 자라고 있어요. 다음달이 산달이에요. 당신의 아이 같은 것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지만, 만약 당신을 떠나올 때 내가 당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서 낳았다고 해 보세요. 시간적으로 따져 봐도 알겠지만 어떻게 내가 다시 임신해서 배가 이렇게 부를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아무리 남자라지만 아이가 몇 달 만에 나오는 지도 모르나요?"

리베라는 불룩 튀어 나온 배를 앞으로 내밀며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사실은 코레오도 아까부터 리베라의 불룩 튀어 나온 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신경이 쓰였었다. 리베라의 말 그대로 시간적으로 따져 봐도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면 리베라가 저렇듯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를 실컷 욕하세요. 처음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내가 당신 집에 찾아간 그날 저녁을 기억하시겠지요? 그것은 나의 실수였어요.

마침 까삐딴이 그 때 비욜카와 한창 정분이 나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때라서 홧김에 잠시 욕정에 눈이 멀어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즐기러 갔을 뿐이에요. 바람난 집시가 아니고 뭐겠어요?

원래 집시여자는 육욕을 쫓아서 바람나기 쉽다는 말을 당신들 갓죠들도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랬다가 당신이 너무 잘 대해주시는 바람에 한순간 저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했고, 또 비천한 집시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갓죠처럼 살아볼까 하고 당신의 마음을 붙들어 두려고 임신한 듯이 말까지 흘렸어요. 그러다가 마침 까삐딴으로부터 비욜카와 자신의 관계는 끝났다면서 나와 다시 살고 싶으니 비욜카를 피해서 스페인으로 도망치자는 연락이 왔어요."

"……."

"시에나에서나 세테바니 집에서 우리를 괴롭혔던 것도 다 까삐딴의 마음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경계한 비욜카 그 나쁜 년이 저를 로마에서 쫓아내려고 꾸몄던 소행이었어요.

사실은 제가 런던에 갔던 것도 까삐딴 때문이 아니었고 제가 웬 집시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가 돌아온 것이거든요. 집시여자의 말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거짓말뿐이지요. 당신같이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것은 하루에 열 번씩이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에요.

불쌍하고 어리석은 양반! 살아보니 역시 집시가 갓죠와 살기란 지겹고도 힘든 일이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진실로 사랑하던 까삐딴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주저 없이 당신을 버리고 나의 본래 위치로 돌아왔을 뿐이에요.

이제는 나의 원래 남편을 비욜카로부터 되찾고 까삐딴의 아이를 곧 낳게 되어 행복하게 살려고 하니 저를 찾아다니지 마세요. 당신 때문에 그라나다에서 여기로 도망쳐 오는 바람에 까삐딴에게 면목이 없으니 당신이 복수심에서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서 여기를 떠나주세요!"

"리베라! 리베라! 이럴 수가. 정말 당신이?"

코레오는 배신감과 허탈감에 싸여서 외쳤다.

"한때 눈이 멀어서 당신을 속인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어쨌든 저로 인하여 당신이 많은 괴로움을 당한 것 미안해요."

리베라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당신하고 살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순간적인 장난이라면 모를까 당신들 갓죠는 근본적으로 우리 집시들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애당초부터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한 사실조차 없지만요. 다행히도 까삐딴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어요. 그는 당신들 갓죠와는 달리 관대한 사람이니까요."

"리베라, 리베라!"

"더 이상 귀찮게 쫓아다니지 말아요. 당신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리베라,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당신 때문에 나는 지난날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리베라, 나는 언제까지고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진심으로 빌겠소."

코레오는 모든 것의 끝까지 오고 말았다는 가득한 절망감으로 휘청거리면서 그라나다의 동굴에서 붙잡혔을 때 집시에게 빼앗겨버린 리베라의 목걸이를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목걸이가 이제는 그녀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리베라로부터 등을 돌려서 한두 발짝 걸음을 옮기다가 코레오는 갑자기 리베라에게 전하라던 왈의 말을 떠올렸다.

"리베라, 왈이 당신에게 전해달라던 말이 있었소. '부모의 마음은 항상 자식이 있는 곳에 머문다'고……. 당신을 만나거든 잊지 말고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하마터면 내가 깜빡 잊고 전하지 못할 뻔했군."

"왈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렇소. 내가 헝가리에 가서 왈을 만났을 때 왈이 당신이 여기 모로코에 있을 거라고 알려주시면서."

"왈이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요? 왈이 어떻게?"

"아, 참 그러고 보니. 왈의 태도가 이상하군. 당신이 까삐딴과 잘 살고 있다면 어떻게 왈이 내가 당신을 찾으러 간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도 않고 무스타파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는지 모르겠군. 왈은 갓죠와의 만남을 반대하셨다며? 당신 말대로라면 왈은 까삐딴과의 만남을 기뻐하셨어야 하지 않겠어?"

코레오는 마음속에 의혹을 느끼면서 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까삐딴과의 재결합을 왈도 반대했으니까요. 왜냐면 굴라치가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죽은 것이 까삐딴이 롬바로의 자리를 빨리 탐내하면서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도 왈은 오해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 로마에서 도망친 것이었고 왈에게도 제가 있는 곳을 알리지 못했었지요. 그런데 당신을 도와준다는 무스타파가 누구죠?"

리베라는 무스타파가 누구인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라곤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랍 노인이지. 그링고 할아버지와는 젊었을 때부터 절친한 사이라고 하시더군. 카사블랑카에 도착하면 우선 무스타파를 찾아가라고 왈이 주소를 적어주셨지. 그러나 그 주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어. 묵고 있던 호텔주인에게 보였더니 고대 그리스어로 된 지명이라는 거야. 그리스라면 몰라도 모로코에서 그런 주소로 뭘 하겠느냐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소리나는 대로 그리스어로 옮겨 적은 것인가 하는 생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런 비슷한 발음의 거리라도 있는가 해서 발이 부르트도록 헤맸지만 허사였어.

거의 절망해서 포기하다시피 했을 때 자신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스타파라는 사람이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지. 하여튼 그 주소는 너무 너무 들여다봐서 꿈속에서도 줄줄 외울 정도로 뇌리에 박혀버렸어."

"……."

"주소가 적힌 종이는 무스타파를 찾고 나서 없애라고 하셨소. 종이는 주소가 적혀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이 부시와 부싯돌도 나에게 주셨지. 왜 이것을 왈이 나에게 주었는지 알 수가 없군."

코레오는 전부터 갖고 있던 궁금증에 호주머니를 뒤져 주소가 적혔다던 종이며 부시와 부싯돌을 꺼내어 리베라에게 보였다.

리베라는 코레오가 보여준 종이와 부싯돌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하는 코레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종이는 부적 같아 보이지만 어쨌든 그 의무를 다하면 필요 없게 될 것이고, 부시와 부싯돌은 옛날 집시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죠. 숲 속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하고 추위를 피하고 산짐승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지요. 비상시에는 위험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해주는 무기로도 쓰였죠. 어쨌거나 왈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니 잘 간직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잘 가세요. 그리고 꼭 행복하세요. 미안해요. 코레오!"

"당신도 잘 있어요. 리베라!"

겨우 대답했을 뿐 코레오는 이미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눈물을 보일까봐 리베라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돌아서서 코레오는 그냥 앞을 향해서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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