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민나 집시데스 99

모래 열풍 속의 차도르의 여신 (5)

등록 2003.08.06 03:39수정 2003.08.0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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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오를 보내고 돌아 온 리베라는 배의 붕대를 풀고 안에 집어넣었던 솜뭉치를 꺼내면서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

차도르를 둘러 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한 듯 바라보며 절망하던 코레오의 표정을 떠올리며 리베라는 진심과 다른 말을 코레오에게 퍼붓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리베라, 정말 보고 싶었어. 얼굴을 보여줘요'라고 코레오가 애원했을 때 자신은 냉정하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었다.

그의 낙담하는 표정에 마음이 아팠지만 사랑하는 코레오에게 자신의 흉측한 모습까지 보이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자신의 찢어진 코의 상처가 발각되었더라면 그 때까지의 자신의 거짓말이 다 탄로 나서 분노한 코레오는 떠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 찢어진 흉한 콧구멍을 가리기 위해서 아랍 여인들의 차도르를 쓰고 나갔지만 그 순간 그나마 차도르로 자신의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그 앞에서 그런 가증스런 연극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코레오, 미안해요. 당신과 세메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당신을 속일 수밖에 없었어요. 아가야, 나는 너의 아빠를 보낼 수밖에는 없었단다.

대신에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버리지 않고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네 곁을 지켜줄게. 아가야, 너의 아빠를 떠나보낸 이 엄마를 용서해 주겠니? 이게 우리들의 운명이란다. 너도 이제는 어차피 집시의 운명을 갖고 살 수밖에는 없단다.


코레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지 못하고 질식해 죽을 것 같이 미친 듯이 사랑해요. 하지만, 하지만 코레오! 저는 이제 당신에게 영원히 잊혀진 여자가 되겠어요. 우리들의 귀중한 사랑의 결실인 어린 세메오를 잔혹한 까삐딴의 손에 죽일 수는 없잖아요. 흑흑흑.'

리베라는 코레오의 얼굴에서 짙게 감쌌던 낙담과 고통의 빛을 떠올리며 흐느껴 울었다.

왈! 저에게 코레오의 아내가 되어도 좋다고 허락하셨군요.

하지만 어쩌면 좋아요! 당신이 마침내 코레오와의 사이를 인정해 주셨는데 까삐딴의 흉계 때문에 코레오를 저렇게 보내고 말았으니 저는 어떡하면 좋아요!

참으려 해도 참으려 해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에 리베라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 내며 통곡을 하고 말았다.

내가 코레오에게 단지 왈이 그에게 준 작별의 선물일거라고 말해버렸지만 부시와 부싯돌은 집시사회에서 옛날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선물이 아니었던가.

혼자서도 독립하여 숲 속으로 떠날 수 있다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배우자를 만나 부모 곁을 떠날 수 있다는 허락이기도 하여서, 숲 속에서 불을 피워 밥도 지어 먹고 무서운 산짐승들을 물리칠 수도 있는 부시와 부싯돌은 옛날에 결혼에서 새살림을 나는 집시들에게 주던 건강과 행운을 빌어주던 상징적인 선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 이렇게 코가 찢기고 흉한 모습으로 붙잡혀 있는 몸만 아니라면 아니, 까삐딴에게 붙잡혀 있는 소중한 세메오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코레오와 도망치다 잡혀 죽어도 상관없었으련만. 아, 세메오! 어떡하면 좋으니! 내가 달아나면 네가 죽을 텐데…….

리베라는 왈의 선물의 의미를 코레오에게 다 설명해줄 수 없었던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길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 길만이 그 사람이 까삐딴에게 목숨을 잃지 않고, 또한 세메오의 생명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단념하고 돌아서게 만들어야 했어.

리베라는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과 절망감에 항거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아까 코레오가 보여주었던 종이는 무엇이었을까?

코레오가 그 주소가 머릿속에 아예 다 새겨지도록 들고 헤매 다녔다던 그 종이에는 왜 그리스어로 뭔가가 적혀 있었던 것이었을까?

왈은 누가 뭐래도 노바라의 마지막 공주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혹시 왈이? 리베라는 며칠 전 까삐딴이 집시의 황금에 대하여 말을 꺼내려는 듯하다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던 일을 떠올렸다.

로마에서는 노바라의 황금이 정말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는 말을 자신을 감시하고 있던 하인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던 것을 리베라도 얼핏 듣기는 했었다.

그 쓸데없는 얘기! 잠잠하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떠돌곤 하는 더 이상 신기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를 왜 또 하고들 있나 하고 지나쳤었다.

노바라가 수백 년 동안 모아 온 황금을 어딘가에 숨겨 놓고 있다는 뜬 구름 같은 이야기는 집시들 누구나 알고 있는 옛날부터 흘러 내려오는 전설인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다른 옛날 얘기는 그렇게 잘 해주던 왈이었지만 어렸을 때 리베라나 오빠가 밖에서 다른 집시들에게 대충 얘기를 듣고 그 흥미진진한 얘기를 해달라고 조를 때면 왈은 '구름 잡는 것 같은 쓸데없는 얘기'라며 말을 막았던 것이다.

하기사 굴라치의 말대로 그 쓸데없는 '노바라의 황금 소문' 때문에 친정가족이 모두 행방불명이 돼버린 왈의 입장에서는 그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당연하지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것은 왈의 말대로 왈의 일가족을 엄청난 불행에 빠뜨리고 만 쓸데없는 풍문일 뿐이야.

노바라의 황금이 왈에게 있었다면 끼삐탄이 돈을 다 걷어가지고 스페인으로 떠나버려서 꿈파니아의 생활이 비참하게도 어려워졌을 때 날마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쓰러져가던 꿈파니아 식구들을 그토록 애달파 하시던 왈이 그냥 두고 보셨을 리가 없어.

내가 런던에 가 있을 때도, 그나마 스페인에서 돈을 보내주시던 그링고마저 돌아가시고 송금이 끊겨 고생하고 있을 때에도 얼마간의 생활비마저 보내주지 못했던 왈이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왈의 나이가 이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노바라의 황금에 대한 비밀을 왈이 알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자신에게마저 이날 이때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야, 소문처럼 집시의 황금이 너무나 막대한 양이기 때문에 쉽사리 손을 댈 수조차 없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혹시 내가 황금의 비밀을 알게 되면 나의 신변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부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아니야, 그것은 할 일 없고 뭔가 터무니없는 것을 상상하기 좋아하는 집시들이 꾸며낸 부질없는 헛소문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좋았던 과거와 함께 모두 사라져갈 운명의…….

리베라는 자신의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버렸다.

까삐딴도 어쩌면 혹시나 해서 아직도 그 소문에 마음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탐욕스러운 까삐딴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하니까. 깊은 골짜기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어느 날 쏟아져 나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집시의 황금이……. 전설 같은 황금의 비밀이 완전히 헛소문으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왈의 신변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렇다면 코레오가 이곳으로 향할 때 우리들의 신변이 위험해지리라는 것을 깨닫고 로마의 집시들에게 소문을 흘려서 만약의 경우라도 목숨만은 지켜주려고 왈이 꾸민 계책이었을까?

아무리 헛소문일지언정 그런 소문의 진위가 밝혀지기 까지는 까삐딴이 우리를 없애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을 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이날 이때까지 까삐딴이 자신과 세메오를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리베라는 왈의 놀라운 지혜에 머리를 숙였다.

어쩌면 그것이 까삐딴의 악마 같은 손아귀로부터 우리의 운명을 보호해 줄지도 몰라!

순간 리베라는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보호해주려는 왈의 마음이 폐부에 와 닿는 것 같아서 리베라는 다시 목이 메이고 가슴 가득히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를 느꼈다.

어떻게 왈이 내가 모로코에 있는 것을 알았을까?

하기사 왈은 집시세계에 널리 알려진 신통한 점술사이긴 하지만……. 왈이 우리들의 처지를 알고 혹시 구해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설령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코레오를 낯선 땅에 달랑 혼자 보내며 그링고 할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한 노인네를 찾아가면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면 왈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었던 거야.

코레오가 막무가내로 조르니까 어쩔 수 없어서 그나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준 것일 뿐.'

언젠가 왈이 자신을 도우려 할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희망의 불길이 순간 타오르려다가 말고, 리베라는 왈이 이미 모든 조직을 사실상 까삐딴에게 장악당한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네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으며 다시금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니야. 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지금 이것이 나의 가혹한 운명일 뿐,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희망도 있을 수 없어. 나는 세메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부터 모든 것을 잊고 짐승이 되어 살아갈 거야!

리베라는 기회만 있으면 다시 싹트려는 부질없는 희망의 싹을 단호하게 마음속에서 잘라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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