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詩 읽기

진은영의 詩集 <일곱개의단어로 된 사전>

등록 2003.08.20 22:56수정 2003.08.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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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질곡을 짊어진 자에게 밤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난 뒤 바라보는 무수한 별과 부드러운 바람, 낮은 목소리로 전하는 살가운 대화는 하루치의 고단함에 대한 더할나위 없는 처방일 것이다.

진은영의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언뜻 샤갈의 그림과도 같은 밤이 있는 배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전갈과 달, 술병과 별이 가득한 밤은 매우 아름답지만 오래 전 부터 우리가 보아 온 것과는 사뭇 다르다.


별은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나는 화가 나서
해를 향해
술병을 던졌다
해가 산 뒤로 슬쩍 피하며
딱딱하고 캄캄한 하늘이
술병에 부딪혀 깨지며 쏟아졌다

별은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나의 눈동자 속으로
유리조각이 산산히 쏟아져내렸다 (거인족 全文)


이 시는 처음 밤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 해준다. 시집에서 일관된 정서적 배경으로 나타나는 밤은 쓰라리게 술을 마셨던 이후에 탄생된 것이다. 한때 술병은 종종 화염병이 되기도 하였으니 거만하게 빛나는 해를 향해 달겨들던 그때 최초의 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산산히 부서진 별은 위안은 커녕 고통스럽다.


위대한 악을 상속받았던 도둑들은 모두 사라졌다
밤(夜) 속에 가득하던 전갈들도

혼자 바닷가를 걷다가
바위와 바위 사이 구멍에 끼인 발


부어올라 빠지지 않는,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 (모두 사라졌다 中)

스위치를 올려주소서
깜깜한 방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신, 왜 그랬을까
아무 것도 안보이는 밤거리로 나가 무신론자,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을까(무신론자 中)


너는 걸어갔다, 맨발로
밤송이가 가득 떨어져 뒹구는 가을

밤(夜)의 늑골 아래
울고 있는 한 마리 새
야광으로 칠해진 오솔길은 없다(거리 中)

나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밤이
해고하러 올 때까지 (야간 노동자 中)


빛나는 해가 <거인족>이라면 밤은 <소인족>일 수 있다. 대낮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지만 밤은 '실패자와 도둑들이 들끓는 시간'이다. 시인은 비록 고통스런 밤에 머물고 있지만 아직 스스로 사표를 쓰지 않았다. '피지 않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그런대로 좋은 법'이므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면 시인은 당돌하게 밤의 창조자이고 싶어한다.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 나무 (견습생 마법사 中)

내 노래에 어떤 프로펠라를 달아야 할까
내가 스무살이냐 열살이냐

아기아기 내 아기
달이 부른다

내 비행기에 어떤 프로펠라를 달아야 할까
나는 잠시 궁리하다가 그림 그린다
엄마의 눈빛 같은 달로
날아가는 비행기
나는 크고 단단한 날개를 원한다
고막이 터지도록 요란한 프로펠라를 원한다

내가 그린 빛나는 달로
내가 그린 요란한 비행기 날아간다

그림이 고요해
나는 들여다 본다
내 그림 속 달은 황달에 걸린 남자 동공 같다
내 그림 속 비행기는 프로펠라 같은 꽃잎을 달았다
내 한숨에 그림 속으로 바람이 분다
달로 가는 프로펠라가 한 잎 두 잎 날린다
내가 울다가 고개 든다, 저기 달로 가는 비행기
달이 긴 그림자 손으로
토닥인다 (달로가는 비행기 全文)


운동권 출신 시인으로서 육감적인 토로에만 의존하던 앞선 몇 몇 시인들이 있었다면 진은영은 섬세한 감성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녀의 시집에서 밤의 서정이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묘사된 시 한 편을 읽는다.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
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숫소를 힘껏 내리치던
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일도 없다
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등이 깜박인다. 칼은 녹슬었고
오늘밤에는 들판에 나가야겠다
풀먹인 하얀 앞치마에 가득히 떨어지는 별 받으러
장미 성운에서 온 것들이 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
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 하얀 재를 한웅큼 쥐어본다
유리창 밖으로 풍경은 거대한 얼음창고 안에 갇혀 있다
눈보라 속 나무들이 공중에 냉동고기처럼 검게 달려있고
유리창을 입김으로 녹이며 그녀는 생각한다
겨울이라는 냉정한 꽃이 제 씨방 속에 간직한 것
붉은 눈송이들이 녹아흐르며 피범벅된 송아지같은 세계가
씨방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진다
물렁물렁하고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다리를 가진,
미리 갈아 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는 일
길고 따스한 혀로 떨고 있는 어린 것를 핥아주는 일
갑자기 여자가 성에 낀 유리창을 활짝 연다
눈이 그치고 맑은 하늘에 토막난 구름 떠간다(정육점 여주인 全文)


서른을 넘긴 시인은 이제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이제 그의 '칼은 녹슬었고' 열정은 '거대한 얼음창고'에 갇혔다. 혁명은 밤을 통과한 이후 "씨방'속의 생명으로 치환되어 졌다. 녹슨 칼을 가는 일은 처절한 어떤 싸움이 아니라 '어린 것'의 탯줄을 끊기 위함이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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