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3.08.29 23:40수정 2003.08.30 16:17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레오나르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아득한 옛날 그리스에 살았습니다. 어느날 그 청년이 깊고 험한 산 속에 들어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청년이 길을 헤매고 있을 때 보기에도 끔찍하고 무시시한 화룡이 나타났습니다. 화룡은 청년을 보자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혓바닥으로 뜨거운 불을 뿜었습니다. 청년과 화룡은 몇 날 며칠을 싸웠지만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4일째 되던 날, 화룡이 힘이 지치자 청년은 일격을 가해 그 화룡을 쓰러뜨렸습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청년의 몸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 피가 흘린 자리에서 이름모를 꽃 한송이 하나 피었습니다. 방울처럼 땡그랑거리며 그 꽃은 진한 향기를 먼 곳까지 뿌렸습니다. 이 것이 바로 은방울꽃에 대한 전설입니다.
정말 애틋하고 비극적인 은방울꽃의 전설은 아득한 옛날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은방울꽃을 본 사람이라면 그 강렬한 유혹에 이끌려 이 전설에 몰입될 만 합니다. 은방울꽃, 몇 명의 가족과 함께 보았을 망정이지 나 혼자만 보았다면 그 아쉬움은 두고두고 내 마음을 괴롭힐 것 같았습니다.
서너해 전 쯤 되었을까요. 처가집 식구들과 산나물을 뜯으러 시골의 깊고 험한 산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면서 산 속에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식구들을 만났습니다. 죽기 살기로 서로 얽혀 싸움질하는 칡넝굴도 만나고, 하얀 밥풀들을 담뿍 입에 문 산꽃들도 만나고, 뱃종뱃종 서러워 울부짖는 새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산길 군데군데 흩어진 산나물을 뜯었습니다.
얼마쯤 올라왔을까요. 사방이 솔숲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묘지까지 올라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곳에 묘지가 있다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길이 너무 멀고 험해 후손들로부터 명절 때면 큰 절 받기 참 힘들겠다는 측은함에 휩싸여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생각은 곧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놀랍게도 군락을 이룬 은방울꽃에 둘러싸여 묘지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참동안 은방울꽃의 군락에 매료되어 정신을 잃었습니다. 등걸굵은 솔 숲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묘지위를 스치면 무수한 은방울꽃들이 물결처럼 술렁거렸습니다. 그 때마다 은방울꽃들은 군무에 맞춰 땡그랑땡그랑 해맑은 방울소리를 내는 것 같았습니다.
산나물을 뜯고 집으로 돌아 와서도 방울소리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꿈처럼 내 마음 구석구석을 맴돌면서 환청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일을 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방울소리는 아예 내 마음 속에 그리움의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우리집 정원에서 외롭게 핀 은방울 꽃 한송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치 산속의 묘지에서 보았던 은방울꽃들 중의 한송이가 씨알 하나를 우리집까지 날려 정원에 뿌리를 내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집까지의 거리가 어딘데"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집 정원까지 와서 핀 꽃은 그때 묘지에서 보았던 은방울꽃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묘지에서 보았던 은방울꽃은 이른 새벽 산바람에 젖은 안개처럼 풋풋하고 진한 풀빛 향기가
났지만 우리집 정원에 핀 은방울꽃은 꽃빛이 바래고 몹시 약해 보였습니다. 강렬한 햇살과 거친 비바람을 쐬며 들볶이다가 온실 같은 환경에서 사람의 손을 타게 되니 자연적으로 야성을 잃게 된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들꽃들과 마찬가지로 은방울꽃도 산에서 뿌리를 내려야 제 맛이 나는 법입니다. 그래야 굴곡이 험한 산맥을 넘고 넘어 먼 곳까지 방울 소리가 울려퍼지게 됩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집 정원에서 외롭게 뿌리를 내린 은방울꽃은 소리없이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아득한 옛날 그리스에서 살던 레오나르드란 청년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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