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3.08.30 13:32수정 2003.08.30 17:4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로 산 지팡이를 들고 할아버지가 동네로 산책을 나갑니다. 할아버지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합니다. 지팡이도 괜히 어깨가 이쓱해집니다. 밭을 매고 돌아오던 동네아낙이 웃음을 띄고 묻습니다.
"할아버지 지팡이 사셨는가 봐요?"
"응. 이거, 이번에 하나 장만했지. 어때 괜찮아?"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어보이며 흡족한 듯 자랑을 합니다.
골목을 막 나오는데 키 작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부릅니다.
"어디가?"
할아버지는 천천히 돌아서더니 지팡이를 듭니다.
"이놈아! 짠! 이거 어떠냐?"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고 키 작은 할아버지를 향해 되돌아 갑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아직 새파란 놈이 벌써부터 지팡이냐"며 못마땅한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팡이를 아래 위로 살핍니다. 할아버지는 기분이 언짢아집니다.
"이 놈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괜히 핀잔주지 말고" 하고는 눈을 흘기더니 길을 재촉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가 뒤돌아서는 할아버지에게 "부럽기는 이놈아, 지팡이 짚는 게 뭐가 부러워 이놈아!"하며 괜히 큰소리를 치며 화를 냅니다.
할아버지는 잠시 멈췄다가 화를 참는지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지팡이도 키 작은 할아버지의 말에 화가 납니다. "내가 어때서? 괜히 나같고 시비야"하며 할아버지를 올려다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할아버지 얼굴은 화난 얼굴이라기 보다는 잔뜩 침울한 얼굴입니다.
이씨네 고추밭은 벌써 추수가 한창입니다. 검붉은 고추밭에 이씨의 모자가 부표처럼 떠 다닙니다. "아고! 힘들다. 저기 가서 좀 쉬었다 가자"하며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고 이씨네 고추밭으로 갑니다.
밭두렁 위 나무그늘에 자라잡은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곱게 내려 놓으시더니 담배를 꺼내 뭅니다. 담배연기가 가을바람을 타고 금세 사라집니다. 저 만치 이씨가 허리를 펴다가 할아버지를 보고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더니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합니다.
"고추가 아주 잘됐어" 할아버지가 목청을 높여 말합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지들이 자란거죠" 이씨가 머리를 긁적입니다.
"무슨 소리여. 이씨가 부지런하니까 이 정도나 됐지. 다른 데는 고추가 안 돼서 난리더구먼".
이씨는 부끄러운지 목례만 하고 다시 고추밭 속으로 사라집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만지작 만지작거립니다. 지팡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들고 말합니다.
"야야! 니 아까 그 놈이 왜 그렇게 화내는 줄 아나?" 지팡이는 괜한 심술이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더니
"아이다. 아이다. 그게 아니다. 내가 벌써 니를 동무삼는 것이 화가 나서 그렇째. 내가 그걸 왜 모르겠노. 그런데 인제는 니 없이는 걷는 것도 힘드니 어쩌겠노"
가을 하늘 만큼이나 깊은 푸른 할아버지의 눈에 하얀 구름을 담은 듯한 눈물이 글썽입니다. 지팡이는 괜히 키 작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심난하게 만든 것 같아 화가 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든든한 발이 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그 후에도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젊은 게 보기 좋다"하시며 할아버지 속을 긁습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만도 할텐데 "옛기 이 놈아. 니도 내 나이 돼봐라"하시며 웃어 넘깁니다. 그때마다 지팡이는 곧장 달려가 키 작은 할아버지를 혼내주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말립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날 키 작은 할아버지가 하루종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저녁을 드시고 키 작은 할아버지 집을 방문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툇마루에 걸터 앉아 뭔가를 다듬고 있습니다.
"이 놈아, 경로당에 왜 안 와. 어디 아프냐?"하며 할아버지가 천천히 처마에 오름니다.
"이 밤에 웬일이냐. 넌 잠도 없냐?"
키 작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출현에 짐짓 당황한 듯 황급히 뭔가를 툇마루 밑으로 집어 넣습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에 할아버지는 "뭔데 그렇게 황급히 감춰"하시며 툇마루 밑을 볼려고 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결사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놈아. 이 밤에 남의 집에 와서 뭘 뒤지고 그래?"하며 할아버지를 제지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의 결사적인 방어에 할아버지도 포기하고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 밤을 재촉합니다. 그때 키 작은 할아버지 아들이 방에서 나오면서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공손히 인사를 합니다.
"이 밤에 어쩐 일이세요, 어르신"
"응, 밥은 먹었냐? 아니 니 애비가 오늘 안 보여서 궁금해서 와봤제."
"네. 아 참! 아버지, 지팡이는 다 만드셨어요?"하며 아들이 키 작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 말에 초저녁 잠을 즐기며 툇마루에서 졸고 있던 지팡이가 깜짝 놀라 처마밑으로 떨어집니다.
"니, 오늘 지팡이 만든다고 안 나왔나?"
키 작은 할아버지는 아들을 보며 눈치를 주다가 할아버지의 다그침에 힘없이 고개를 끄떡입니다.
"곰마, 참!. 괜찮다. 늙으면 어쩔 수 없는 게지. 그게 뭐 부끄럽노. 니, 내한테 말 한 것 때문에 지팡이도 못 짚고 다녔냐. 이놈아! 이 미련한 놈아" 하며 할아버지는 껄걸 웃으시며 키 작은 할아버지 등을 칩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눈만 흘깁니다. 할아버지가 툇마루 밑에 있는 지팡이를 찾아 꺼내 봅니다.
"지팡이는 뭐니뭐니 해도 흠이나 틈이 없어야 썩거나 부러지지 않는데. 음- 정성을 많이 들였구먼."
"어때 괜찮아 보여?"하며 키 작은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말에 화가 풀리셨는지 반색을 하며 할아버지 곁으로 바짝 붙습니다.
지팡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그래. 제대로 된 것 같아".
"히히히. 내가 옛날부터 손재주는 좀 있었지" 키 작은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칭찬에 금세 화가 풀어집니다.
처마 밑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 "진작에 해드렸어야 하는 건데 자식이 아버지에게 지팡이 선물하는 거 아니라고 해서 힘드시는 것 알고도 못해 드렸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산에 가셔셔 나무를 직접 하나 구해 오시더니 저렇게 손수 다듬으시더라구요" 하며 죄송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키 작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 봅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는 애써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합니다.
"새파란 놈이, 벌써부터. 니도 걱정이다 이 놈아!"
"사돈 남말하지 말어. 이 놈아. 지팡이 짚은 건 니가 먼저야."
"나는 그래도 너처럼 미련하게 힘든 거 참지는 않어 이 놈아."
"그래. 나마저 지팡이 짚으면 너도 기분 참 좋겠다? 빨리 늙어 가는 네 모습 보기 싫어, 힘들어도 지팡이 안 짚었어 이놈아! 니 놈이 날 보고 지팡이 던져버리고 당당하게 혼자서 다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이놈아."
"이 놈이…"
두 할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겹겹이 쌓인 주름사이로 눈물이 골을 타고 내려옵니다.
키 작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마저 다듬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할아버지 지팡이에게도 두 분의 우정만큼이나 돈둑해질 새 친구가 곧 생길 것 같습니다.
"쓱싹 쓱싹" 가을 밤 정적을 깨고 지팡이가 여물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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