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에 직장을 그만둔 B는 올해 나이 47세로 예전에는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가 IMF로 인해 회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수 년을 헤매다 아는 이의 소개로 겨우 자리잡은 곳은 지방의 조그만 회사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구조조정(?)으로 또 다시 실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모든 연락을 끊고 어딘가 여행을 떠나버렸다. 몇 일전 술 한 잔 나누는 자리에서 "어디 깊은 산이라도 들어가서 마음을 추스리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이후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어디선가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이 구조조정이지 그가 먼저 있던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에서 받은 상처는 매우 큰 듯하다. 많은 실직자가 그렇듯이 심한 "패배감"과 "배신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거기에 무력감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의 실직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
그의 실직은 이미 수개월 전에 예고되어 있었다. 사장은 "부득이 자리하나 줄여야 하니 이해해달라. 작업인력을 자를 수는 없지 않느냐"며 나이 들고 돈 많이 받는 자신을 정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B는 사전통보를 받은 뒤로 하루 하루가 지옥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가장 고민스런 일은 내가 없으면 회사가 잘 안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스스로를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한마디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사장은 위로해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부하직원들도 미안한 마음으로 재직기념패까지 해주며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하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사장이 이런 일이 있기전에 서로 상의하며 해법을 찾다가 나온 결론이라면 수긍이 가지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B는 혼자만 꿍꿍거리며 수 개월동안 집에 알리지 못했다. 그만두기로 결정된 보름 전부터는 회사에서 사무실의 책상조차 치워버렸다. 나와도 일을 안 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보름간 그는 언론이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무작정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아내와 자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서면 그야말로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신을 가다듬고 어디에 취업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문을 보면 구인광고가 있지만 중년인 저한테는 해당되는 게 없지. 설사 있더라도 돈 가지고 들어오라는 투자임원을 찾거나 프랜차이즈 같은 것뿐이야" 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한마디로 실업자를 오라는 데는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자들의 돈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그의 공허한 출근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얼마를 견디다 못해 그는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다른 남자들이 실업자 신세가 되어도 가족에게 말 못하는 것을 보면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해왔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어도 당당하게 아내에게 이야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B는 세 명의 자녀가 아직 대학조차 진학하지 않은 상황에서 차마 자신의 실직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당분간 그의 공허한 출근은 계속될 전망이다.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다른 실직자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새로운 해법을 찾아나가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할 뿐이다.
국가와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년실업문제의 심각성을 보다못해 우선 명예퇴직자들을 위한 인터넷사이트 명퇴닷컴(myungtoe.com) 운영에 나선 이두열 대표는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음에도 실업자가 아닌 우리들은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방관하고 있다"라며 그들의 생활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그들 중에는 경험 많은 우리 사회의 베테랑으로 그들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이 안타깝다. 그들이 종래의 근무환경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수 십 년 경력을 쌓아온 중년실업자들이 비록 지금은 쓸모 없는 사람들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분명 그들에겐 우리의 경제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 있다. 이들을 방치하는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가 투자해온 인적자원이다.
수십 년 된 나무로 성장한 그들이 고목나무 쓰러지듯 절망과 한숨으로 힘을 잃는다면 그 나무의 그늘에 있는 그들의 가족이나 후진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그늘은 없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