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詩 읽기-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다시 읽는 장정일의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등록 2003.08.31 19:51수정 2003.09.0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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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을 열고 오래된 시집 하나를 꺼낸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의 이 첫 시집은 87년 12월 중판이다. 색 바랜 표지엔 '제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라 씌여 있다. 내가 중판을 갖게된 이유가 짐작되기도 한다. 툭툭 먼지를 턴다. 겁에 질린 듯 한 표정을 한 시인의 사진은 흑백이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너무 흔하다. 소년원 출신, 중졸의 학력, 여호와의 증인교 신도 등을 새삼 언급하는 일이 따분할 지경이다. 한 때 수많은 모방작을 거느릴 만큼 시의 전범이었다. 그는 시에만 머물지 않았다. 신춘문예 희곡과 많은 베스트 셀러 소설을 썼다. 외설작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여백에 짧은 메모 한 줄 없는 옛 시집을 펼친다. 다시 읽는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이란 제목의 첫 시가 평범하게 읽힌다. 아니 평범하지 않게 읽히기도 하다. 갓 스물 두살의 시에 가득 배인 눈물과 나이 보다 훨씬 더 살아버린 삶이 보인다. 꿈꾸는 '사철 나무 그늘'을 그는 생면부지의 우리에게도 드리우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 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을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사철나무 그늘아래 쉴때는' 부분)


굳이 서시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이 시의 희망이 그의 출발이요 귀결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고 보면 그는 매우 따뜻하고 소박한 시인이다. 그 후의 소설이나 이력이나 외모가 주는 도발과 방종 혹은 음울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쥐가 된 인간' '지하도로 숨다' 로 이어지는 그의 시는 사철나무 그늘은커녕 지상에 기어오르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시인에게 주어진 지상의 현실은 최소한의 욕구조차 거절당한 야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나는 사람도 아니다' 라고 절규한다. 그의 형편을 안다면 지나친 비관을 탓할 수도 없다.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위에 하얀 타자기
키판은 고른 옥수수알 같이 밖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라면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 번...세 번...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석유를 사러' 부분)


방이 하나면
근친상간의 소문을 무릅쓰고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지낸다. 아니
아들과 어머니사이에
진짜로 근친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방이 하나면
쌀통 위에,
책꽂이를 얹는다. 그리고
교과서의 줄을 잘 맞추어 둔다
어머니, 책더미 위에는
더 무엇을 얹어야 방이
넓어질까요?

(중략)

그리고 여자친구와 몰래
한 이불을 덮을 수는 없겠지
방이 하나면
어린 연인들은 여관을 찾아
떠다니리. 손목을 잡고
어슥하게 떠다니리

방이 하나면
방이 하나면......
아 아 개새끼!
나는 사람도 아니다. ('방' 부분)


가난은 곧잘 비극을 불러온다. 가난이란 비관에 의한 극단적인 선택이 쉬운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극약을 마시거나 차도로 뛰어든다. 발버둥치는 아이를 안고 비정하게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반대로 지독한 가난이 성공의 밑거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실을 긍정하는 건강한 낙관으로 난관을 극복한 의지인들이다. 장정일 자신도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 뚝뚝 살점이 묻어나는 자신의 체험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 시집을 출세작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도 성공한 낙관주의자 일지 모른다.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 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지하인간' 全文)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 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어갈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어졌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석유를 사러' 부분)


이 시집의 많은 시편들이 음침한 성(性)을 비루하게 다루거나 자본주의 혹은 소비주의에 대한 경멸과 조롱으로 채워져 있지만 '사철나무 그늘'이 암담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추구였던 것처럼 경멸과 조롱은 욕구의 반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의 희망은 한마디로 극복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자고, 멋진 여자와 섹스하는 것이다.

시집은 자신의 건강한 욕망을 성실한 자세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읽는다. 이것이 장정일 시의 참된 힘이 아닐까?. 책 뒤에 붙여 놓은 한 평론가의 관념적 비평처럼 그는 매우 엉뚱하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내가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 줄 듯 자신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난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슬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강정 간다' 부분)


지금 시단(詩壇)은 매우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배출되는 시인들은 지나치리 만큼 많지만 시의 역량은 형편없이 침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도 그렇고 식욕을 자극하는 참신한 시란 좀체 만나기 어렵다. 좋은 시, 건강한 시란 무엇인가? 내가 다시 장정일의 시집을 꺼내 든 이유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 지음,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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