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째 시묘살이...이일규씨의 특별한 삶

등록 2003.10.11 17:16수정 2003.10.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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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 참전해 불귀의 객이 되신 삼촌 두 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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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마지막 소망은 전사한 삼촌의 유골을 이곳에 모시는 것입니다" 14년째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이 씨가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김호경

마산 진동에서 진주 이반성 방향으로 난 국도를 달리다 보면 사시사철 잘 깎여진 잔디와 정돈된 비석, 마치 어느 왕족의 무덤처럼 정성을 다하여 모셔진 묘 9기가 눈길을 끈다.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들은 '잘 나가는 어느 집안의 선산'쯤으로 치부하고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어느 무덤인들 사연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무덤에는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매일 새벽과 늦은 저녁이면 머리가 희끗한 촌로가 무덤 앞에 나타나 큰 절을 올리고, 손으로 일일이 잔디밭에 난 잡초를 제거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근처 농부들에 의하면 묘를 관리하는 촌로의 행각은 "이미 10여 년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귀뜸했다.

뼈대 있는 종가의 종손도 3년이면 시묘살이를 끝을 내는 데, 무려 10여 년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있다니…. 대체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이며, 무슨 사연으로 이렇듯 지극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까.

태풍 '매미'가 남해안을 강타한지 며칠 지난 지난달 19일, 묘 입구에 들어서자 신을 신고 들기에 민망할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무덤을 지키는 백구 두 마리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듯 짖어대기 시작했다.

무덤 곁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촌로 역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취재팀을 대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취재팀에게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대단한 일도 아니다"며 거절했다.

"잊혀져 가는 경로효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취재를 하고 싶다"고 몇 차례 설득에 그는 환한 웃음으로 무덤가 잔디밭에 앉아 담배를 권했다. 담배 연기를 하늘로 몇 차례 내뿜는 그의 눈에는 금세 굵은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바로 효령대군의 21대손으로 마산항 해운 노조에서 일하고 있는 이일규(마산 진전면·61세)씨였다. 이씨는 지난 89년 진전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고·증조부, 할아버지, 부친 그리고 5촌 당숙의 묘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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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가 유일한 벗. 이씨가 얼마전 태어난 강아지들과 함께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 경남우리신문

이씨는 이때부터 묘지 한켠에 비닐 하우스를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부인과 자녀들은 마산에 생활하고 자신은 고독(孤獨)을 유일한 벗으로 삼아 묘지를 관리하며 지내고 있다.

"할아버지 자식들이 모두 요절했지요. 부친은 3살 때 병으로 운명을 달리했고, 삼촌 두 분은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해 유골도 찾지 못했고, 또 한분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 상태…. 나머지 한 분마저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씨의 할아버지는 일제 때, 삼진 의거 현장에서 맨손으로 일본 헌병과 싸우다 급소에 총탄을 맞고 부상당한 이몽재 열사다.

"시묘살이를 왜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씨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할아버지의 슬하에 5명의 자식을 두었는 데, 모두가 기구하게 운명을 달리해 죽어서도 제사밥 한 그릇 얻어 먹지 못하는 삼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묘살이'외에 달리 없다는 것.

이씨의 품안에는 고이 간직해온 전사확인서가 있었다. 이 전사 확인서에는 이수백(형), 이수경(제) 두 형제가 1950년 10월 1일 지명을 확인할 수 없는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버님도 제가 3살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두 번째 삼촌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지요."

이씨가 진전 초등학교 1학년이던 해에 전쟁이 발발해 삼촌 두 명은 참전해 전사하고 마지막 남은 삼촌마저 미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던 진전면 곡안리 제실 뒷산에서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부친과 형제들이 이렇듯, 허무하고 기구하게 운명을 달리한 탓에 이씨는 혈혈단신이 되어 마암면의 외할머니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 되던 해에 비슷한 사연으로 외가집 신세를 지고 있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렇듯 부친 형제들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사망하는 통에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어 호구지책 차원이었다.

마암면에서 두 명의 자녀를 출산한 이씨는 마산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고조부 형제의 후손이 마산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 인연으로 집안의 잡일을 거들면서 생활을 시작했다.

"군대도 안 가도 되는 데 갔습니다."

21살되던 해 이 씨는 삼촌 두 분이 전사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음에도 당숙모가 부산 병무청에서 서류를 잘못 발급받아와 입영해 안양에 있는 공병대에서 3년동안 군복무를 해야했다.

제대 후 이씨는 해운노조에 입사해 35년간 일해왔다. 이씨는 올해 말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묘지 일대 주인을 찾아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쳐 영원히 이곳에 조상님들을 모시고 두 분 삼촌의 유골을 찾아 안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상 초유의 태풍 '매미'가 급습했을 때도 이씨는 골짜기마다 물이 넘치고 나무가 쓰러지는 위험 속에서도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지켰다.

본래 묘자리가 작은 계곡 옆에 있었던 터라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자주 침수되곤 하여 작은 계곡을 몇 년에 걸쳐 혼자서 팠다. 60대 노인 한 사람이 팠다고 믿기에는 힘들 정도로 깊고 튼튼했다. 일부에서는 "미친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림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씨에게는 이들의 비아냥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다. 그의 마지막 소망인 두 분삼촌의 유골을 찾아 이곳에 모시고, 그분들의 흔적을 이 땅에 남기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취재팀은 그의 작지만 오래동안 기원해온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취재팀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이씨는 이내 묘 주변에 나 있는 잡초를 손으로 뽑아내며 고독과 악수하며 시묘살이로 돌아갔다. 돈 때문에 부모를 때리고 죽이는 이 각박한 세태에 이씨의 14년 시묘살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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