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배운 한국어, '사랑' 입니다"

노숙자들과 함께 하는 '빈민들의 대부' 김하종 신부

등록 2003.10.23 10:52수정 2003.10.2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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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자들이 찾아간 시간이 마침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김하종 신부

기자들이 찾아간 시간이 마침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김하종 신부 ⓒ 김진석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안나의집>.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이발과 옷 증정이 있는 수요일은 안나의 집이 가장 붐비는 날 중 하나이다. '안나의 집’은 98년 교인들이 힘을 합쳐 만든 노숙자를 위한 보금자리다.

조립식 컨테이너 건물 한 쪽엔 무료 이발을 받기 위한 노숙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가 하면 정보지를 보며 일거리를 찾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에선 "우리 어머니가 나 같은 아들을 놓고 미역국을 먹었다…"는 한탄과 오래된 기침 소리가 새어나온다.

담배 한 개비를 여럿이 나눠 피고 있는 발 디딜 틈 없는 마당을 지나면 300여 명의 노숙자가 저녁 배식을 하는 식당이 있다. 식당 한 곳엔 '문화의 공간'이 있어 취미와 휴식을 즐기는 노숙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a 한국 생활 14년째인 김하종 신부. 그의 한국음식 솜씨는 프로(?)급이다.

한국 생활 14년째인 김하종 신부. 그의 한국음식 솜씨는 프로(?)급이다. ⓒ 김진석


성남지역 '빈민들의 대부' 김하종 신부를 아시나요?

300명에서 많게는 370여 명에 이르는 노숙자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엔 도마와 칼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한창이다. 깊은 갈색 눈동자와 곱슬머리를 지닌 성남지역 '빈민들의 대부' 김하종(45·본명 보르도 빈첸시오) 신부. 낡은 청바지에 오래된 구두를 신고 있던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기자를 맞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동안 몇 마디 나누는 사이 곳곳에서 '신부님' 을 찾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2001년 서울명예시민(시민생활 향상에 공로가 큰 국내 거주 외국인에게 주는 상)에 선정되기도 한 그는 90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 성남의 독거 노인,소년·소녀 가장, 노숙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의 '하종'과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성을 따 스스로 '김하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국에서 봉사하기를 권한 오블라디 선교단의 제의로 성남에 온 그의 첫 생활터는 성남의 달동네 목련마을이었다.

일일이 성남의 달동네를 가정방문하며 독거 노인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주고,장애인들을 찾아 팔,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스스럼 없는 이웃이 됐다. 빈민들을 방문해 직접 얘기를 들으며 자연스레 한국말을 배우게 된 그는 93년 무료급식소 '평화의 집’위탁운영, 94년 노숙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운영, 95년‘도시빈민을 위한 자원봉사자 협의회’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우연히 맺은 성남과의 인연이 무려 13년간 이어오면서 그의 손길을 거친 성남 빈민 지역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김 신부는 '빈민들의 아버지'로 통한다.

a 모든 음식이 모두 준비 됐다. 자원봉사자들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김하종 신부

모든 음식이 모두 준비 됐다. 자원봉사자들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김하종 신부 ⓒ 김진석

12년 동안 김 신부를 지켜봤던 오현숙(50) 총무는 "노숙자들을 생각하면 겨울에 편한 잠을 자는 게 미안하다고 말할 정도로 타인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는 사람" 이라고 말했다. 또 오씨는 "노숙자들이 고르고 남은 옷을 마지막에 골라 입는 등 자신을 위해 돈 쓸 줄도 모르는 검소한 사람이다"라며 신부님은 세속적인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게을러서 혹은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노숙자가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은 정말 그렇지가 않아요. 노숙자 대부분은 어린 시절을 고아 혹은 소년 소녀 가장으로 교도소나 보호시설 같은 곳에서 보내며 보통 사람과 같은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이에요.


아주 오랜 유년 시절부터 상처를 받아 육체적, 심리적, 성격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특별한 사람들이죠. 보통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실직자는 다시 스스로 일어 설 수 있지만 그 외 대부분의 다른 노숙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무조건 노숙자를 나쁘게만 보지 말고 그들이 도대체 '왜?' 노숙자가 됐는지 제발 딱 한번이라도 직접 물어 봐주고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김 신부의 간곡한 부탁이다. 실제로 안나의 집을 어슬렁거리는 노숙자들 중 몇몇은 겉으로 보기엔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건장한 젊은 청년이 있는가 하면 앳된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김 신부는 실직자 노숙자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숙자 외에도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무작정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와 노숙자로 전락한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그와 얘기를 하는 중 곳곳에서 보낸 후원 물품이 도착했다. 간단한 냉동 식품이 오는가 하면 제과 제빵 학원에서 실습생이 만든 빵이 배달되기도 했다. 이에 김 신부는 저녁 먹고 나가는 노숙자들에게 아침식사를 대신할 빵을 나눠주기 위해 또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일 뉴스엔 사건·사고 등 나쁜 일들이 많이 보도되지만 실제론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도와주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우리 안나의 집이 지금까지 운영되는 거죠. 제빵사는 빵을 만들어 주고, 의사는 진찰을, 상담원은 상담을 하는 등 마음만 있다면 다 제각각 가진 재능을 발휘해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어요."

"사지도 멀쩡한데 맨날 놀고먹는 노숙자를 왜 돕냐구요?"

안나의 집은 현재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일반인과 이탈리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신부는 '노숙자 문제' 를 엄연하게 독립적인 사회 복지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한국을 아쉬워 했다. 현재 안나의 집을 찾는 노숙자의 70%는 성남 지역이 아닌 영등포 및 청량리에서 온 서울 지역의 노숙자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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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한국에서는 98년 IMF때 노숙자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 전부터 노숙자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 곳곳에 10% 이상을 차지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예요. 그저 사람들이 잘 몰랐을 뿐이지 노숙자 문제는 IMF와 상관없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회 복지의 일환이죠.

일반적으로 장애인 복지에 대해 주장하듯 노숙자도 대등한 문제로 취급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한국 사람들은 고아원이나 양로원의 후원에 대해선 관대해요. 하지만 노숙자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면 '멀쩡한 사람을 뭐하러 도와주냐?'고 하며 오히려 의아해 하죠.

예전에 가난할 때는 서로가 같이 힘들고 어려운 걸 알기 때문에 노숙자를 서로 이해해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끌어 안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현대사회로 올수록 '나' 중심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노숙자가 설 곳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는 한국 정부의 노숙자 문제 인식 부재가 곧 지원의 부재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김 신부는 2년에 한번씩 고향인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방문 후에도 쉬지 않고 고향의 노숙자 상담을 하는 그는 한국의 노숙자들과 그들의 고민이 '똑같음' 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어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가 '노숙자 문제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인정하고 난 후에는 끊임없는 대화로 노숙자의 얘기에 귀 기울여 줘야 해요. 사람을 진정 바꿀 수 있는 건 폭력이나 위협이 아닌 사랑, 자비, 용서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숙자 문제를 바라 볼 때는 긴 안목이 필요해요.

저도 처음엔 제가 많은 애정을 쏟은 만큼 곧 노숙자가 좋은 모습으로 변할 거라 기대했어요. 하지만 안일한 생각에 불과했죠. 노숙자들이 상처받았던 시간만큼 치유되는 데도 똑같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아요."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자 어느덧 노숙자들에게 옷을 나눠줘야 할 시간이 왔다. 후원으로 받은 옷 중에는 쓸만한 옷들이 꽤 많았다. 더러 어떤 의류 업체는 유행이 지난 새 옷들을 보내기도 했다. 새 옷은 무조건 라벨을 떼버려야 한다. 옷에 라벨이 붙어 있을 때엔 소주 한 두 병을 먹기 위해 옷을 팔아버리는 노숙자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로 인해 노숙자들에게 인기 있는 품목은 '점퍼'와 '양말'이었다. 혹 뒤늦게 와 점퍼를 얻지 못한 이들은 '옷이 없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욕심 많은 어떤 이들은 점퍼를 태연하게 걸치며 아무 말 없이 두 벌을 챙기려 하기도 했다. 점퍼와 양말에 이은 인기 품목은 '털모자'였으며, 비인기 종목의 선두는 '양복'이 차지했다.

노숙자들이 옷을 고르고 있는 중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났다. 그러자 김 신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 갔다. 사연인 즉 술에 만취한 노숙자가 다른 이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다행히 사태는 초반에 별 탈 없이 마무리 됐다.

a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나눠 줄 옷을 준비하고 있다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나눠 줄 옷을 준비하고 있다 ⓒ 김진석

"초반에 진정돼 그나마 다행이네요. 가장 힘든 건 술 드신 노숙자들이 서로 싸울 때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말을 해도 통하지 않고 오로지 힘만 통하니 정말 속상하고 힘들죠. 때론 싸움을 말리다 같이 싸워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해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도 옷을 받은 후 김 신부에게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이에 김 신부도 노숙자들에게 일일이 반응하며 "따뜻하게 입으시라"는 말과 환한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왜 하필 많은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을까? 그는 조용히 웃으며 "선생님은 왜 지금의 집에서 살고 계세요?"라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제가 당연히 있을 곳에, 제 집, 제 나라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왜 외국인이 한국 사람을 돕느냐?'는 것인데 전 제가 외국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믿는 예수님이 만든 세상은 단 한 세상입니다. 여러 민족과 국가를 나눈 건 예수님이 아닌 사람입니다. 때문에 전 다른 사람이 아닌 제 형제 자매와 함께 예수님이 만든 한 나라에 같이 산다고 생각을 해요."

김치, 된장찌개, 불고기에 이어 여름엔 보신탕도 먹는다는 김 신부는 못 만드는 한국 음식이 거의 없다. 한국말이 너무 어려워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그가 가장 먼저 배운 한국말은 다름 아닌 '사랑'이란 단어라고 한다. 이어 김 신부는 자신이 정말 행복한 사람임을 설명하며 일의 보람을 꿈의 실현으로 표현했다.

"오래 전부터 제 꿈은 어렵고 힘든 사람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제가 여기 있음으로 그 꿈이 지금 이뤄진 것 같아요. 그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제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줄 수 있는 것에 큰 보람과 희망을 느껴요."

a 오늘 메뉴는 햄 볶음, 제육 볶음, 된장찌개이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한끼의 식사는 1인당 약 1700원의 비용이 든다. 김하종 신부를 도와 같이 일하고 있는 오현숙 총무는 "김 신부님이 먹는 것은 절대 아끼지 말라고 당부한다"며 김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오늘 메뉴는 햄 볶음, 제육 볶음, 된장찌개이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한끼의 식사는 1인당 약 1700원의 비용이 든다. 김하종 신부를 도와 같이 일하고 있는 오현숙 총무는 "김 신부님이 먹는 것은 절대 아끼지 말라고 당부한다"며 김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 김진석

불과 30여 만에 옷이 거의 다 나갔다. 점퍼가 부족한 것을 아쉬워하는 김 신부는 점퍼를 대신할 수 있는 스웨터를 준비하고 마구 헝클어진 운동화 끈을 손수 가지런히 묶으며 헌 운동화의 새주인맞이를 도왔다.

옷이 전달되고 있는 가운데 시작된 노숙자 저녁 배식 행렬 또한 옷을 받으러 온 긴 행렬 만큼이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선 IMF가 풀리고 난 후 노숙자 분들도 같이 많이 줄어든 걸로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IMF가 발생했을 때와 지금은 전혀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간혹 더 늘어날 때도 있는 걸요."

그의 보살핌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는 노숙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 신부는 "겨울이 오면 길에서 얼어죽는 노숙자도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지도 멀쩡한 것들이 일은 안하고 맨날 놀고 먹고 한다는 부정적 인식이 제발 바뀌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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