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는 흔들리는 비행기에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기르글을 마주보고 꼿꼿하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짐짓 그를 무시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로 지나쳐서 계속 조종실 쪽으로 향하려 했다.
"멈춰! 리베라, 뭐야 그 손에 핸드폰은?"
기르글이 자신을 제지하며 물었을 때 리베라는 마음속으로 작전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리베라는 일부로 핸드폰을 손에 늘어뜨리고 있었던 것이
었다.
하기사 그는 벌써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리베라가 오히려 핸드폰을 숨기기는커녕 손에 든 채 당당하게 걸어오자 당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작전을 위한 나의 미끼인줄도 모르고…….
"어떻게 핸드폰을 들고 있는 거야? 까삐딴이 잘라 외에는 아무도 핸드폰을 갖지 말라고 명령했잖아?"
기르글이 반말로 말하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리베라에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무례를 범하고 있었다.
하기사 여기저기 소문을 캐러 다니기 좋아하는 교활한 기르글이 대강 눈치야 챘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표면상으로는 아직도 까삐딴의 여자가 아니던가!
"내가 당신하고 같아요? 까삐딴이 나한테 몰래 갖고 있으라고 말했어요. 만약에 잘라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는 나에게 지시하겠다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잘라가 지금 전화를 안 받는대요. 그래서 까삐딴이 빨리 잘라에게 가서 명령을 전달하라고 했어요."
"뭐, 까삐딴이!"
기르글은 순간 멍청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제정신이 돌아온 듯 완강하게 막아서며 총을 겨누었다.
"안돼! 이쪽으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잘라가 명령했어. 나한테 말해. 내가 전달할 테니까."
"까삐딴이 잘라에게만 직접 전달하라고 했어요. 좋아요, 당신이 싫다면 가지 않겠지만, 만일 당신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그 때 당신은 까삐딴에게 죽을지도 몰라!"
서슬 퍼런 리베라의 말에 기르글은 겁을 먹은 듯 당황해했다.
"당장 저리 비키지 못해요?"
리베리는 그를 한껏 노려보고는 조종실을 향하여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기르글은 뒤에서 우물쭈물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리베라를 막지 못
했다.
리베라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스스로가 놀랐다. 손잡이를 만져보았지만 조종실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리베라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누구야?"
안에서부터 잘라의 경계심으로 곤두선 목소리가 들렸다.
"리베라예요. 급히 전할 말이 있어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기르글, 개새끼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딩가와 같이 승객들을 감시하고 있어요."
"이 새끼들이 정말!"
잘라의 욕지거리와 함께 '찰깍'하고 걸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잘라는 총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튼 침착하게 기회를 노려서 권총을 뺏어야 해.'
살며시 안으로 들어서며 리베라는 부지런히 궁리를 짜냈다.
권총을 겨누며 리베라가 들어오는 것을 흘낏 돌아본 잘라는 리베라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의외로 반기는 듯한 태도로 맞이했다.
"도대체 공주님께서 온 용건이 뭐요?"
"전할 말이 있어서요."
"호오! 전할 말이라고? 뭔데, 빨리 말해봐"
공주를 대하는 태도로는 너무나도 건방진 말투였다.
아마 집시공주인 왈의 손녀인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승객들이 너무 겁에 질려있어요. 어차피 몇 명 되지도 않아 대들 수도 없을 텐데. 기르글과 딩가가 너무 윽박질러서 공포에 떨고 있어요. 저러다가 여자들이나 아이들 중에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생기면 인질 협상을 할 때 큰일이잖아요"
잘라는 리베라의 얼토당토않은 바보 같은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리베라로부터 전달 받은 바깥 상황에 저억이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마침 잘 왔어. 공주님께서 외로우셔서 이 잘라와 마지막 순간을 즐기고 싶은가 본데 애석하지만 너무 늦었어."
잘라가 총구를 다시 조종사의 뒤통수에 갖다대며 말했다.
아! 역시 인질 협상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이들은 죽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잘라가 나에게.
자신을 향하여 마구 돼먹지 않은 농담을 뱉어내는 잘라의 행동을 보고 리베라는 파비오의 전화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쇼나 똑바로 봐둬! 그러지 않아도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던 차에 잘 들어 왔군!"
잘라는 앞만 바라본 채로 내뱉듯이 말했지만 이미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일단 고비는 넘긴 셈이다. 지금부터 기회를 노려야 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베라는 마음을 다그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갑자기 꾸며댄 자신의 말이 의외의 효과를 본 것이었다.
그 때서야 리베라는 조종석 한쪽 의자 밑으로 검붉은 피가 한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잘라는 이미 한 사람을 쏜 것이었다.
안전벨트에 매어져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한 채 조종간에 자듯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 때까지 기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총알이 겨드랑 밑으로 파고들었는지 그의 옆구리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천천히 안전벨트를 타고 흘려내려 그의 구두 위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리베라는 충격으로 정신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현기증과 함께 구토를 하며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이 안으로 들어오는 데까지 성공한 이상 어떻게든지 총을 뺏어서 잘라를 쏘아야 한다! 그러면 조종사가 무사히 착륙시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리베라는 말뚝처럼 경직된 조종사를 살펴보았다.
조종간을 잡은 채 미동도 못하고 앞만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하기야 옆자리의 동료가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서 피를 쏟고 있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닐 것은 당연하다!
그 때 비행기 앞창으로 거대한 자전거 바퀴형태의 하얀 구조물이 가깝게 내려다 보였다.
그것은 역시 밀레니엄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는, 언젠가 TV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놀이기구 같이 생긴 전망대, 런던 아이(London Eye)였다.
깜깜한 런던의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의 불빛을 받아서 환하게 흰색 바퀴살을 펼치고 있었다.
"이봐! 천천히 가란 말이야, 아주 천천히! 저기 저 앞쪽으로 불빛 한 가운데로 시커멓게 내려다보이는 하이드 파크 위를 지나가면서 고도를 더 낮춰!"
"자, 이제 충분히 왔으니 방향을 완전히 돌려서 오던 쪽으로 되돌아간다."
"예? 오던 쪽으로요?"
"그렇다. 어서 기수를 돌려서 아까 지나쳐 온 하이드 파크 위로 다시 가란 말이야! 어서!"
권총 끝으로 조종사의 귀를 짓이기며 잘라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비행기는 크게 원을 그리며 선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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