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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꼴찌'라도 배구가 하고 싶어요"

[인터뷰] '팀 해체' 벼랑 몰린 서울시청 배구단 감독과 선수들

03.11.10 17:15최종업데이트03.11.1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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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배구팀은 지난 82년 2월 창단돼 20여년 동안 수많은 배구팬들에게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아쉬움을 안겨준 전통 있는 팀이다. 80년대 후반에는 각종 대회에서 수 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박삼용, 이성희, 오욱환, 서남원 등 국가대표 선수들도 여럿 배출해냈다. 특히 89년 대통령배대회 3차 대회에서 사실상 대학팀인 서울시청이 내로라 하는 실업팀들을 죄다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 감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올드 팬들도 많으리라. 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11월 5일 서울시 체육회는 "4일 시장단 회의에서 비인기 종목 육성을 위해 배구, 축구팀을 해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인 해체통보를 받은 배구, 축구팀 선수단은 망연자실해 있다. 선수들은 하루아침에 운동을 그만둬야 될 처지에 놓여 있고, 앞으로의 진로도 '안개 속'이다. 가만있다 뒤통수를 얻어맞아서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서울시청 배구팀 이문섭 감독
ⓒ 문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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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통보를 받았지만 서울시청 배구팀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은 모두 숙소에 남아 있었다.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일단 계약기간이 끝나는 12월 31일까지는 협상안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시청 배구팀 숙소 근처에서 이문섭 감독과 선수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 중에도 이문섭 감독의 전화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가방은 갖가지 서류뭉치들로 가득했다. 억울해서 밤잠도 안 오고, 말을 하도 많이 해서 목도 아프다고 한다. 말하는 중간 중간 목이 메이는지 울컥하길 수 차례. 하지만 상황이 너무 절박한지라 사람들에게 팀 해체의 부당성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하루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서울시청 배구팀이 갑작스런 해체통보를 받은 것은 지난 11월 5일. 말 그대로 통보였다. 사전에 해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구나 선수단은 전국체전과 실업배구대제전을 마치고 10일간 휴가 중이었다. 하지만 숙소로 복귀한 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전국체전 3위 입상에 대한 '보너스'가 아니라 어이없는 '해체통보'였다. 그것도 숙소에서 밥 먹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문섭 감독이 더욱 분통을 터뜨린 건 서울시 체육회의 성의 없는 자세 때문이다. "선수들이 1년 계약직이니까 12월 25일까지 월급 주고 위로금 조로 두 달치를 더 주겠대요. 배구 스카우트 기간도 지났고, 당장 배구를 그만둬야 되는데 진로 결정할 틈도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내쳐버리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죠." 선수들도 서울시 체육회의 처사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문 보면 서울시 체육회에서 선수들의 향후 진로를 모색해준다고 나왔던데 사실 그 부분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군대 가는 애들은 군대 간다고 쳐도 나머지 군대 면제된 선수에 대한 대책이나 군대 갔다오고 나서 '남아라' 이런 얘기도 전혀 없었고요."(김상기 선수) 서울시 체육회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비인기종목 육성'이다. 하지만 지난 대구 U대회에서 남자 대표팀이 금메달도 땄고, 2년여 동안 질질 끌어오던 LG화재 이경수 문제도 해결되어 배구 붐이 다시 일어나려는 지금, 서울시청 팀 해체 결정은 분명 배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비인기종목은 뭐고, 인기종목은 뭐예요? 전 구분이 안 가요. 그런 명분이 맞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처사나 방법에는 정말 화가 나요. 어떻게 감독 허락도 없이 선수들한테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떻게 밥 먹지 말고 나가라고 그래요." 현재 남자실업팀은 여섯 개에 불과한 상황. 팀 수가 부족한 탓에 프로화 작업은 매년 제자리걸음이다. 서울시청이 해체되면 대학졸업생들이 갈 곳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되면 꿈나무 선수들도 배구를 점점 외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서울시청 해체 여파가 다른 공사 팀으로 확산되는 것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냥 손놓고 있는 걸까? "협회에서 12월에 개막하는 V-투어리그에는 참가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기간동안 인수할 팀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노'라고 했어요. 우리가 잘하는 팀도 아니고. 차라리 각 구단에서 선수 1~2명씩 받아주는 게 낫다고 했어요."(이문섭 감독) 그래도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선수들한테서도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좌로부터 전장원, 유도중, 신지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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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통보를 받은 이상 번복은 될 수가 없어요. 통보가 난 이상 해체되는 건 어쩔 수 없죠. 협회에서는 V-투어리그만 나가달라고 하는데 거기 나가면 선수들을 두 번 죽이는 게 돼요."(신지현 선수) "다들 배구 너무 하고 싶어하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근데 시합을 나가면 서울시민구단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갔지 서울시청 이름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김상기 선수) 이문섭 감독은 해체의 부당성 외에도 그동안 배구부가 받았던 숱한 차별과 극심한 냉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색도 점점 붉게 변해갔다. 서울시 체육회에서는 연초에 운동부 감독들에게 예산서를 제공해 준다. 이문섭 감독은 2003년 직장운동경기부 세출 예산(2003년 1월, 서울특별시) 문서에 근거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원래 서울시청팀에 5개부(축구, 배구, 육상, 복싱, 양궁)가 있었어요. 5개부 인원을 최대 60명으로 정해놨어요. 작년부터 운동부 운영이 시청에서 서울시 체육회 쪽으로 넘어오면서 사이클부를 새로 만들었어요. 전체 인원은 60명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우선 각 부 코칭 스태프를 2명에서 1명으로 줄였는데, 유독 배구팀만 선수까지 12명에서 9명으로 축소시킨 거예요. 대신 사이클은 선수 7명을 새로 뽑았고요." "선수연봉이 A, B, C급 3개 등급으로 나눠져 있어요. 시청에서 운영했을 때는 배구부는 전부 B급으로 통일했어요. 근데 지금 배구는 다 C급이에요. 다른 부는 형평성에 맞게 A, B, C급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일방적으로 '야, 배구는 다 C급이야' 그런 거예요." "장비비 예산이 올해 삭감됐거든요. 그럼 부마다 어느 정도 같은 비율로 삭감해야 되는데 배구부가 5588만원으로 가장 많이 삭감됐어요." 조용히 이문섭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선수들도 그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왔던 불만들을 쉴새없이 토해냈다.
 김상기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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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버스가 있는데 축구부랑 같이 써요. 축구가 인원수(20명)가 많으니까 거의 축구부가 쓰죠. 저희는 감독님 차(9인승 카니발)랑 박광열 선수 밴이 있거든요. 거기에 10명이 끼어 타요. 밴에 볼이랑 네트 싣고, 체구 작은 선수 한 명은 짐칸에 타고요. 덩치나 작으면…." "전용체육관이 없으니까 잠실체육관 보조경기장에서 훈련을 하는데 예산이 없다고 겨울에 운동할 때 히터도 안 틀어줘요. 그나마 체육관도 마음대로 못 써요. 행사 관계로 사용 못할 때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참으면서 했는데…." "선수들이 9명밖에 안 되잖아요. 이번 체전 때도 삼성이랑 하는데 세터 2명, 리베로 1명 빼면 6명이서 공격을 해요. 한 번씩 때리면 공이 없어요. 볼 주우러 가면 또 공격할 사람이 없어요. 공격하다 보면 볼이 없고.(웃음)" 지난 전국체전 대 삼성화재 전. 비록 지긴 했지만 서울시청은 악착같은 플레이로 그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로부터 승리한 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선수가 9명밖에 안 되니 쉴 틈이 없었다. 후반 급격한 체력 저하가 이날 패인 중 하나였다. "진짜 어디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거나 심하게 다치지 않으면 그냥 참고 운동해요. 아파도 내색을 못하죠. 다쳤을 때 치료비도 저희가 부담하고요. 대학원 다니는 선수도 있는데 학비도 저희들이 내요." 연초에 이문섭 감독은 '배구단 활성화 계획안'을 작성해서 윗선에 올렸다고 한다. 다른 실업팀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 정도 지원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내용을 살펴보자면 1) 최소한의 엔트리 구성(감독1, 코치1, 선수 12명) 2) 선수 대학원 등록금 지원 3) 선수급료 인상 4) 여건이 허락되면 선수 스카우트 비 지급 등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요구사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시청 배구팀 경기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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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이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어금니 꽉 깨물고 견뎌왔던 것은, '만년 꼴찌'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것은, 배구를 사랑하고 배구를 하고픈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선수들의 이런 '소박한 꿈'이 온통 짓밟히고, 마구 짓이겨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82년 서울시청 창단 멤버로 21년간 서울시청에 몸담아온 이문섭 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 없이 열심히 따라와 준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에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어요"라면서 '선수들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야, 밥 악착같이 먹어." 인터뷰를 마친 후 이문섭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서울시는 배구팀을 버렸지만 팬들은 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숨어있던 배구팬들도 '서울시청 살리기'에 팔 다리 걷어붙이고 나섰다. 서울시청 배구팀의 부활을 위해서! 선수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서울시청 배구단을 살리자' 글 남기기 http://volley.new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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