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이 후문이냐?

서강훈의 즐거운 고딩일기 - 내가 담을 타는 이유

등록 2003.11.26 20:28수정 2003.11.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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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종이 치고 첫 번째 과목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바로 전 찰나, 지각 대장 K군이 헐레벌떡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a 언뜻 보기에도 높은 학교 뒷담

언뜻 보기에도 높은 학교 뒷담 ⓒ 서강훈

K가 놀라운 타이밍으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반 친구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또 으레 물어보는 말이 있었으니…….

“K너 교문에서 안 걸렸냐?”

“걸리긴, 다 안 걸리는 방법이 있지. 이 K님이 걸리긴 왜 걸려.”

“그 방법이란 게 뻔하지 너 또 담 타 넘었지?”

“헛, 녀석 눈치 하난 빠르다니까.”

사실 K군의 집이 학교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반 친구들이라면 다 알만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밥 먹듯 하며, 또 그런 주제에 절대 교문에서 지각생으로 적발되거나 하는 일이 없는 친구가 바로 K였다. 이는 K가 능수능란하게 학교 뒷담을 탈 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담타기가 마음만큼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내가 담타기에 관심을 보이며 여러 질문을 하자 K는 신이 나서 설명하면서도 여러 가지 주의할 사항을 일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학교 뒷담의 높이에 대해 그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그리 만만한 높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또 담의 높이도 높이지만, 담을 탈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중에 매달린 얇은 줄 하나가 전부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담타기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거기에 비라도 오면 사정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지난 여름, 비 오는 날 담을 타던 1학년 학생이 미끄러져 병원에 간 일도 있었다.

이러한 위험 문제도 큰 일이었지만, 지역 주민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 또한 담타는 학생들에겐 부담이다. 곧잘 담을 타곤 했던 L군은 매일 같은 시간에 청소 하러 나오는 아저씨와 항상 실랑이를 벌인다고 투덜댔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힘든 점이 있음에도 학생들이 굳이 담타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a 한 친구가 담타는 요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친구가 담타는 요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서강훈

이 질문에 K는 “담타기는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것 같이 흥미진진해”라고 장난스런 대답으로 넘아가려는 듯 싶더니, 이내 속내를 털어 놓았다.

말인 즉 교문에서 지각생으로 적발되어 학생부에 자기 이름이 적히거나 일명 ‘조폭’선생님께 혼나기 싫은 게 그 이유란다.

사실 지각생들에게 있어서 교문은 확실히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학교 내에서 그 명성(?)이 자자한 조폭 선생님께 호되게 당하는 것도 싫지만, 지각생으로 적발되어 학생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 대학 갈 때 학생 기록부에 이것이 반영돼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 친구들 몇몇이 지각을 많이 하자 담임선생님께서는 매를 드시며 “지각 하면 학교 생활기록부에 올라가니까 내일부터 늦으면 가만 안 놔둔다”하고 엄포를 놓으셨다.(고3 학생들에게 있어 대학 진학에 필요한 요소, 하나하나는 매우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담타기도 이제 현 고3들에게는 시들해졌다. 3학년은 수능시험 종료와 함께 학교 등교시간 9시(가방도 매지 않고 9시 10분 전에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에 하교시간 11시라는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굳이 담타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문제는 아래 학년 녀석들.

좋은 것을 배워도 모자랄 판에 지각을 피하는 처세를 배워가는 어린 것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게다가 담타기는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라나는 후배에게 선배들이 전수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에 K는 담타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를 전하면서도 담타기를 할 때 유용했던 줄을 끊어버려, 좋지 못한 버릇을 우리 대에서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고3 내내 신나게 담을 탔던 K군도 이제 졸업할 나이가 되어가다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나 보다.

a 담을 탈 때 생기는 상처는 으레 있는 일이다

담을 탈 때 생기는 상처는 으레 있는 일이다 ⓒ 서강훈

교문의 공포와 생활기록부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담타기. 비록 그것이 아름답지 못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다 큰 녀석들이 벌벌 떨며 담을 넘어서는 것을 선생님들께 들키지 않기 위해 전력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우스꽝스러움은 나중에 학창시절을 돌아볼때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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