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3.12.08 12:58수정 2003.12.0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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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한 구석 수챗구멍 주변에 살얼음이 덮여 있고, 어머니가 틈틈이 짜고 있는 벙어리 장갑이 빨리 완성되길 손꼽아 기다리던 초겨울 무렵.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37년 전 얘기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식사는 누나와 단둘이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직장이 인천에 있어 늘 밤늦게 퇴근하셨고, 어머니는 오후가 되면 소위 ‘보따리 장사’를 나갔는데 대략 9시쯤 귀가하여 늦은 저녁을 드셨다.
맨 위의 형은 중학교 입시 준비로 친구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항상 통금(통행금지) 무렵에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저녁 시간엔 세 살 위인 누나 혼자서 자기 욕심만 챙길 줄 아는 어린 나를 건사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의 변두리, 하고도 산번지(山番地)에 둥지를 틀고 살던 고만고만한 집 여자 애들은 거의 그러했겠지만, 누나 역시 밥짓는 일은 기본이었다. 그 밥을 한다는 일이 요즘처럼 전기 밥솥에 전원만 연결하면 되는, 그런 우아한 작업이 아니었다.
연탄불 위에서 밥을 포함한 모든 음식이 만들어지고, 특별한 경우나 돼야 아껴두었던(?) ‘석유 곤로’를 꺼내 쓰던 때였다. 아무튼 누나는 여간해선 ‘3층밥(밑 부분은 타고, 중간은 제대로 익고, 위는 선 밥)’도 만들지 않고, 찌개도 곧잘 끓여 내곤 했다.
밥반찬이라고 해야 맨된장찌개에 무장아찌, 김치가 거의 사철 고정 메뉴였다. 반찬 투정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물리도록 먹어야 했던 수제비보다야 그래도 밥이 나았다. 아마 밀가루는 무상 배급으로 나왔던 모양인데, 라면도 비싸서 못 사먹던 서민들에겐 가장 만만한 대체 음식이었다.
대개는 수제비와 굵은 멸치 두어 마리만 둥둥 떠 있는 국물이지만, 어쩌다 호박 채 썬 것이나 감자, 풀어 넣은 계란이 들어 있기라도 하면 ‘이야’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선이나 고기 맛을 보려면 식구 중 누구 생일이나 명절을 기다려야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들 식생활을 영위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판국에 그날은 누구 생일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데 생선을 먹게 된 것이었다. 꽁치였다. 어디서 났는지 어머니가 소금에 절인 꽁치 두 마리를 누나에게 보인 후, 저녁 때 둘이 구워 먹으라고 하며 외출하신 것이었다. 누나 한 마리, 나 한 마리. 지금 기억으로도 끽해야 어른 손바닥 길이를 넘지 않은, 비쩍 마른 꽁치였다.
그러나 그게 어딘가! 나나 누나에겐 황송할 만큼 최상의 반찬이요, 별식이었다. 나는 해가 한 뼘쯤 남았을 때부터 누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서 저녁을 먹자고 성화를 부렸다. 혹 아버지라도 일찍 들어오시면 어떡하나 조급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누나는 ‘그럼 너 이따 밤에 배고프면 어떡할래?’라는 말로 내 성화를 잠재웠다.
밖이 깜깜해지고서야 누나는 밥을 안쳤고, 드디어 꽁치 굽는 냄새가 부엌과 연결된 쪽문 틈으로 해서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냄새라니!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꽁치 한 마리를 신나게 발라먹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들고 온 밥상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꽁치가 달랑 한 마리만 놓여 있었다. 으잉? 이유를 묻는 내게 누나는 우리가 한 마리를 가지고 반씩 나눠 먹고, 한 마리는 어머니를 위해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아예 부엌 찬장에 고이 모셔놓고 온 상태였다.
나는 대놓고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 ‘나쁜 아이’가 된다는 정도는 알 만한 나이였으니까. 그렇다고 ‘그래 누나, 한 마리는 엄마 드리자!’하고 선뜻 동의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또 너무 아쉬웠다. 내 몫으로 생선 한 마리가 온전히 배당된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실인즉, 나는 누나가 저녁을 짓기 전부터 이미 ‘잔머리’를 굴리고 있던 판이었다. 누나는 내가 떼를 쓰면 결국 들어주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내 몫을 얼른 다 먹고 누나 것도 좀 더 달라고 해야지, 그런 잔머리 말이다. 그런데 한 마리도 아닌 반 마리만 먹자고?
나는 입을 쑥 내밀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칭얼대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욕심꾸러기 어린애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게 뭐 대충 그런 거였다. 그러자 누나가 다시 나를 설득하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엔 ‘당근’이 두 개나 들어 있었다. 하나는 그렇게 하면 엄마한테 칭찬 받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대신 누나 몫을 좀더 먹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근’을 덥석 물었다(누나는 결국 꽁치를 아주 쪼끔밖에 먹지 못했다).
이윽고 어머니가 지친 모습으로 귀가하셨다. 누나가 얼른 부엌으로 나가 미리 차려 놓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 위에 놓인 꽁치 한 마리. 어머니의 눈이 놀라움에 흔들렸다.
“이게 웬 거냐?”
누나가 대답했다.
“우리는 한 마리 갖고 나눠 먹었어. 엄마 먹어.”
누나의 장담과는 달리 어머니의 ‘칭찬’은 없었다. 아니 칭찬을 할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 눈에 물기가 차오르고, 그 물기를 삭이려는지 자주 큰 한숨을 내쉬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기 때문에. 대신 나는 칭찬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다. 누나 한 번, 나 한 번. 그렇게 식사 내내 우리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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