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우유 살 돈은 어디서 났을까

김밥이야기 5

등록 2003.12.15 09:23수정 2003.12.1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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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4시간 문을 여는 김밥집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밤낮이 바뀌고, 해가 떠오르면 하루를 마감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활 리듬이 바뀌게 되니 역시 얼굴에서부터 변화가 생깁니다. 얼굴에 붉은 반점들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손을 대면 흉터가 생길 터인데 계속 손이 가게 됩니다.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닌데, 오랜 시간 반복된 생활 리듬이 바뀌니 몸이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야간에 근무하는 주방 이모와는 이제 손발이 조금씩 맞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동을 만들 때 우동 위에 얹는 유부와 튀김, 김가루 등을 준비하는 것도 이제는 타이밍이 잘 맞습니다. 또 주문도 밀리는 것 없이 잘 됩니다. 주방 이모를 도와서 하는 양파 썰기도 이제는 슬슬 재미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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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분식집이기 때문에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음식을 만들 때 몇 가지 공식 혹은 철칙이 있기 때문에 음식 맛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모든 음식에는 들어가는 오뎅 가지수, 만두 개수, 바지락의 개수 등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정해져 있어도 사람들마다 음식 모양과 맛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야간에 일하는 이모의 경우는 손이 크기 때문에 밥의 양이 주간에 일하는 이모의 두 배 정도 됩니다. 저는 김밥 양념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짜게 하는 편입니다. 당연히 밥맛도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중지 마디까지 오게 하는 물의 양이 사람들마다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음식 맛뿐만 아니라, 테이블 세팅 방식과 그릇을 내는 것에도 사람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납니다. 저는 근무 시간 중 앞의 두 시간은 주간 근무자와 일을 합니다. 물론 제 스타일대로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 때는 주간 근무자의 스타일을 따라 주고, 야간에는 야간 근무자의 스타일대로 합니다.

야간에는 저도 제 스타일, 제 방식대로 합니다. 1500원짜리 라면과 2000원짜리 라면 그릇을 동일하게 냅니다. 주간에는 500원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음식을 내는 그릇이 다릅니다. 덮밥의 밥을 펴는 방식도 다릅니다. 계란을 놓는 위치도 사람의 개성이 반영됩니다.


보통 이런 것들은 주로 주방에서 하고 저는 서빙이나 배달을 주로 합니다. 하지만 일이 많으면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보조 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와주려고 주방에 들어갔는데, 각자의 스타일과 다르게 준비를 해 주면 일은 오히려 두 배가 되어 버립니다. 아니 하니만 못한 꼴이 되어 버리지요.

좋은 소리는커녕 "누가 이러데?"라는 핀잔만 듣게 됩니다. 소금 대신 설탕을 넣는 것도 아닌데 음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밥을 적게 담는 사람도 다 이유가 있고 많이 담는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뒤의 일도 꼭 꼬입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 일이 잘 안 풀린 것도 정신이 없고, 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떡라면을 그냥 라면인줄 알고 1500원으로 계산하였다가 다시 뛰어가서 손님에게 500원을 더 받기도 하고, 2500원짜리 보통 칼국수를 해물 칼국수인줄 알고 3000원으로 받아서 도로 돌려드리기도 합니다. 같은 돈을 내지만, 이렇게 되면 손님들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유독 배달이 많은 날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시켜 놓은 것을 보고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고, 그릇을 찾으러 가면 잘 만났다는 듯이 주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주문을 하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여러번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이런 날은 다시 전화가 와서 반찬이 너무 적다며 더 가져다 달라고 하거나 미리 잔돈을 챙기지 않아서 두 번 발걸음을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잠깐 짬이 나서 기껏 물걸레로 바닥 다 닦아 놓으면 손님이 마구 몰려 오기도 합니다. 당연히 물이 촉촉히 뭍어 있던 가게 바닥은 손님들의 발자국으로 더렵혀자집니다. 이럴 때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닦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오는 손님에게는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얼마전에는 늦은 밤에 어떤 여자분이 혼자 들어왔습니다. 손님에게 다가가니 전화 한 통만 쓰자고 합니다. 약간 당황했지만,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는 건 문제 없지만 거는 전화는 안 된다고 말을 하니, 무섭게 쳐다봅니다. 여자분은 술을 약간 한 상태였습니다.

야심한 밤에 가게를 하면서 느낀 건데, 술에 취한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섭습니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그 눈빛에 저는 말없이 전화기를 건넸습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인지 계속 왔다 갔다하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뒤로 쏠렸다 합니다. 순간 나의 시선은 온통 바닥으로 향했습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 선명하게 발자국이 찍힙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발자국이 제 가슴에 찍힌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돈을 받지 않고 음식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와서는 기껏 내온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해서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도 만취 상태였고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상태입니다. 이번에도 같은 복장과 혀 꼬인 소리를 하고 나타났습니다. 주문도 역시 '라볶이'였습니다. 주머니를 계속 뒤지고 지갑을 열었다 접었다 하는데, 돈이 없어 보였습니다.

돈이 있냐고 물으니, 돈을 찾아오겠다며 문을 열고 나갑니다. 잠시 뒤에 바나나 우유를 사들고 온 그 사람은 역시나 포장을 해달라고 합니다. 포장을 하고 돈을 달라고 하니 없답니다. 황당할 따름이지요. 동전을 모으니 1200원이 됩니다. 하나 둘 세더니 "됐지요?" 이러면서 가려고 합니다. 돈이 모자라다고 말을 하고 부르니 그마저 다시 주머니로 넣어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처음으로 당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주방 이모를 쳐다 보니 신분증을 받으랍니다. 신분증을 달라고 하니, 그 사람의 표정이 변합니다. 취객들은 표정이 조금만 변해도 무섭습니다. 원래 그렇게 말하냐고 물어옵니다. 그 말에 저는 그냥 포장된 봉투를 건네고 맙니다. 싸움으로 변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꼬이고 꼬인 날. 피날레를 싸움으로 장식할 수는 없기에 조용히 보냅니다. 정신이 없어 일이 꼬이기도 하지만, 예기치 않은 손님 때문에 일이 꼬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막상 집으로 와서 하루를 돌아보면 웃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제 정말 일에 익숙해지려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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