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멧사발(기자이몽이도). 뒤집어 굽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덕사 고봉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촬영이 성사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정한 날에 촬영을 하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보 사발을 촬영 하는데 촬영에 드는 비용은 고사하고 촬영 팀에게 차까지 내어 주겠다는 일본측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사비까지 써가며 열심히 일했던 김 PD와 뒤를 도왔던 나에게도 아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1994년 6월 17일 촬영 날 아침, 교토.
김 PD는 어떻게 구했는지 무궁화 꽃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것에서 필자는 김 PD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측에서 배려한 차를 타고 대덕사의 고봉암에 도착했습니다.
대덕사의 규모는 옛날에는 합천 해인사보다 여섯 배나 더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대덕사는 구획 정리로 나누어져 절 중간의 도로와 건물 등이 함께 있어 우리나라의 큰 사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입니다. 그리고 50개의 암자가 여러 곳으로 분산 되어 있기에 대덕사 본 절에서 고봉암까지는 차로 20~30분 걸려 우리는 도착 했습니다.
고봉암의 입구는 일본의 유명한 절답게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었고 손님을 기다렸다는 뜻으로 절 입구에는 물이 촉촉히 뿌려져 있었습니다.
6월의 이른 여름이라 고봉암의 정원의 꽃들은 손님을 기다렸다는 듯 더욱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히사다 종정과 고봉암주지를 비롯해 일본의 여러 찻사발 전문가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촬영팀이 촬영 준비를 끝내자 곧이어 주지 스님이 큰 오동상자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주위는 아주 엄숙함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이 큰 상자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상자를 풀자 그 안에는 점박이 무늬가 새겨진 흰 보따리에 감춰진 또 다른 상자가 나왔습니다.
그 감춰져 있던 두 번째 상자 뚜껑을 열자 이번에는 흰 비단으로 된 천에 세 번째 상자가 조심스럽게 싸여 있었습니다. 세 번째 상자를 열자 줄무늬 비단에 칠기로 보이는 검은 네 번째의 상자가 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진주멧사발(기자이몽이도). 빛에 따라 달라 보여지는 사발의 때깔 대덕사 고봉암
그 검은 칠기 상자의 우측 상단에는 금색의 글씨로 '고려(高麗)'라는 한문이 각인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정호(井戶)'라는 금색의 글자가 보였습니다.
이런 류의 사발들을 일본에서는 이도(井戶)라 부르고 이 국보사발의 개인 이름은 기자이몽이도(喜左衛門井戶)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필자는 일본식 이름이 아닌 우리말로 이것을 진주멧사발이라 부릅니다.
드디어 뚜껑을 열자 일본인들이 후쿠사라 부르는 두 겹의 일본손수건 안에 솜을 넣어 누빈 천이 그 사발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빈천을 펼치자 기대감을 뒤로 하고 또다시 자주색빛의 비단천이 보였습니다.
그 자주빛을 덜어내자, 우리 한국 사람이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야말로 평범하게 보이는 사발이 소박하게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 사발과 한국의 인연의 끈은 어찌 할 수 없나 봅니다. 400년 동안 타국에서 모국사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주멧사발(기자이몽이도). 두손에 들고... 신한균
이 사발은 그저 말없이 우리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발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시집간 사발입니다. 일본에서는 신화적인 사발이며 도자기로서 일본 최초로 국보가 된 사발 입니다.
이 사발을 탐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침략 전쟁을 일본에서는 찻사발 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전쟁까지 일으킨 사발…. 그러나 이 사발은 모국에서는 이름도 없이 그저 막사발로 불리고 있으며 때로는 일본식 이름인 이도자완이라고 불려 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 이 사발의 애달픈 메아리가 필자 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모국에서 내 고향은 어디인가, 내 이름 또 무엇이며, 그리고 내가 진정 잡기(하찮은 그릇)였는가….”
그리고 이 사발을 보고 이것을 빚은 조선 사기장의 솜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나는 가슴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저런 명품을 단순한 잡기라고 표현했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 사발을 단지 밥공기인 잡기였다는 일본식민 사관에 빠져 있던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 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었습니다.”
김소월님의 <옛이야기> 중….
촬영이 한참 진행 중인, 그때였습니다. 아뿔사! 이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이 사발을 들어 뺨에 비비기 시작 했습니다.
400년만의 우리 사발과의 극적인 만남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리포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장면 입니다만, 이 사발을 만질 때 지켜야 하는 예절을 지키겠노라고 한 나로서는 몹시도 난감했습니다.
또한 그 리포터는 도자기 전문가가 아닌 소설가였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일본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PD는 이 사발이 가진 전부를 시청자에게 알리고자 이 사발을 손 물레 위에 얹어 놓고 돌리면서 촬영을 끝냈습니다. 이분의 일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꺽을 수 없었습니다.

▲진주멧사발(기자이몽이도). 첫 번째 만남 신한균
촬영이 끝나자 고봉암 주지스님과 히사다 종정이 한국 사기장인 나를 위해 내가 직접 만지고 감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필자가 이 사발을 드는 순간의 기분은 이 사발이 마치 종이처럼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나 그 자체가 아주 계산 된 사기장의 뛰어난 창조적 정신에서 탄생 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발은 약간 비뚤어져 있었으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사랑하는 조선사기장의 여유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사발을 탄생 시킨 원동력은, 단순 명쾌하게 미의 본질을 간파한 조선 사기장의 심미안과 창작의 발로에서 시작 된 것이 었습니다. 이 사발은 사기장인 필자의 눈으로는 도를 통한 사기장이 가장 큰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도저히 빚을 수 없는 명품이었습니다.
단순히 기능만으로 도자기를 빚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 아니 도자 전문가가 이 사발을 본다면 이 위대한 사발을 잡기인 막사발이라 부르는 자를 용서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 뒤 내가 일본에서 들은 촬영에 대한 후일담을 여기서 고백하자면, 국보인 문화재를 뺨에 갖다 대 비비고 또한 촬영할 때 손 물레 위에 국보 사발을 놓고 돌리면서 촬영하다니 어이가 없어 했다는 후문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소개 한 일이라 일본으로 건너가 이해를 구했습니다. 좋은 프로를 만들 겠다는 젊은 PD의 열정을 이해 해 달라고 설명하자 일본인들도 이 말에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주멧사발(기자이몽이도)의 내부의 맛이 아주 깊다. 신한균
필자는 말합니다. 깨어질 우려가 있는 문화재 촬영 때에는 그 물건에 대한 에티켓을 반드시 지키며 촬영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어디에도 깨어질 우려가 있는 문화재는 물레 위에 얹어 놓고 돌리면서 하는 촬영은 허가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뒤부터는 한국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면 자기들이 인정할 수 있는 차 전문가나 도자기 전문가가 아니면 절대 만지는 것은 금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진주 MBC는 일본의 어디에도 없는 일본 국보사발을 손 물레 위에 놓고 촬영한 유일무이한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촬영한 것이 큰 방송상도 받았음을 밝힙니다.
이 사발과의 첫 인연은 필자가 우리 사발연구에 몰입하여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자세 또한 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발을 그때까지는 사진으로만 보고 연구했던 나의 지식은 무지했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후에 우리 사발을 직접 보고 만져 본 것을 위주로만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간혹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주멧사발과 두 번째의 만남, 옆은 주지스님의 아들과 함께... 신한균
그 때의 이 프로그램 제목이 ‘조선막사발’이었습니다. 이 사발을 보고도 '막사발'이라는 표현을 막지 못했던 제가 아직도 후회스럽습니다.
그 뒤 필자에게는 이 국보 사발과 두번째의 인연이 있었습니다. KBS의 관계자가 NHK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어 이 국보 사발 촬영협조를 부탁했으나 여러 여건상 성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뒤 본인의 참여로 이 국보 촬영이 또 한번 성사 된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 만남을 통해 이 사발은 일본인이 말하는 잡기(막사발)가 아니라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진주 부근의 민가의 제기 였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이 국보 사발은 막사발이 아니라 제기였던 진주 멧사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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