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고농축 참고서를 소개합니다

온집안을 도배한 출제 예상 문제 메모지

등록 2003.12.29 13:22수정 2003.12.2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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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방송통신대 기말고사가 지난 20일에 있었다. 1학기에 비해서 2학기에는 김장하는 시기와 맞물려 주부인 내 입장에서는 부담이 더했다. 배추를 다듬어서 소금에 절이는 것부터 배추 속에 들어갈 무와 생강, 마늘, 새우젓 등 양념을 준비하는 것만도 만만치가 않았다. 마늘을 까는 데는 왜 그렇게 더딘지, 밥 한 공기 분량을 까는데도 시간 반이 족히 걸렸다.

"으어아우오 으어아우오 이에애위외 이에애위외…"


마늘이 담긴 양푼 옆에 외워야 할 것을 적은 쪽지를 놓고 나는 계속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국어음운론'에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후설(後舌)과 전설(前舌) 모음이다. 이 모음은 평순과 원순으로 나눠지면서 고모음과 중모음, 저모음으로 또 갈라진다. 이걸 애초에 외우지 않고서는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이걸 다 외우고 한숨 돌리자마자 넘어야 할 고비가 또 버티고 있다. 조음 위치에 따라 ㄱ,ㄴ,ㄷ,ㄹ,ㅁ… 등 각각의 음소들은 입술 소리인 양순음, 잇몸에 근접한 치조음, 또 경구개음 등으로 나누고 다시 파열되는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으로 나눠진다.

게다가 수학의 공식처럼 '규칙'이 있어서 그 규칙에 맞춰 가다 보면 또 다른 규칙이 나오기도 한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설명하는 말은 더욱 헷갈려서, 다른 나라 말도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듣고 써왔던 말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손은 마늘 껍질을 벗기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시험 공부로 와글와글 들어차 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찬 내용은 내 입을 통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오백년 전 세종대왕이 지은 '용비어천가'와 '월인석보'의 그 중세 언어들은 도무지 낯설고 생경해서 머릿속에 고름이 고이는 것 같았다. '중세국어연습'은 내게만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어려워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나라 사람이 모두 쓰고 있는 말의 뼈대라고 생각할 때 어떤 근원을 찾아 홀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묘한 신비감마저 들었다.

한 문제만 틀렸어도 과락이 될 뻔했던 1학기 기말시험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따로 공부할 여력도 없지만 계절 수업을 준비하고 다시 시험을 보는 그 절차도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이 안 되도록 눈을 부릅뜨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다른 학우들은 도서관에 다니거나 독서실을 잡아서 공부하기도 한다. 도서관도 멀고 돈을 내야 하는 독서실은 더더욱 갈 수 없는 나는, 생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주방 싱크대와 컴퓨터 앞, 책꽃이, 화장실 등에 노란 메모지에다 깨알같은 글을 써 여기저기 붙였다. 저걸 언제 다 외우나 싶었던 것들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눈에 띄는 대로 보다 보니 흩어진 내용들이 어느 순간 의미 있게 연결이 되어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알집'으로 변해갔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느긋함과 조급함이 교체되었다. 문득 생소한 글 한 줄이 눈에 띄면 교재 전체를 다시 훑기도 했다. 공부하면서 내 기억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하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고 넘어갔다. 공부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간격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즈음 우리 집 시계는 특별히 빨랐다. 시험 전날, 나는 집안 여기저기 붙여 있는 메모지를 다 떼냈다. 그것을 노트에다 다시 붙이고 잠자기 전,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때까지도 알쏭달쏭 애매한 부분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메모지가 붙여진 노트는 전체 여섯 과목이 한군데에 모아진 나만의 고농축 참고서가 되었다.

1교시, 시작을 알리는 방송음이 들리고 내 앞으로 시험지가 넘어왔다. 두 과목에 70문제, 주어진 시간은 70분이었다. 3교시까지 시험을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의 '알집'은 헝클어지지 않고 순조로왔다.

내 입을 통해 수없이 중얼거렸던 말들이 문제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 봤던 교재의 한 부분, 그 언저리 어디쯤에 무심히 지나쳤던 대목이 또한 문제로 드러나기도 했다. 한동안 집안 구석구석 붙인 노란 메모지는 살아서 꿈틀대며 눈앞에서 확실한 시험 문제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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