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연애 편지'를 보냈습니다

설원을 아름답게 하는 자연들을 보다

등록 2003.12.30 07:19수정 2003.12.3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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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민수

한참을 걸었습니다. 한라산 중산간의 이차선 도로가 빙판길로 더 이상사람들의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더 궁금해 졌습니다. 저 1112도로가 끝나는 그 길, 그 숲 속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흰눈이 내리던 그날에도 소의 형상을 닮은 섬 우도를 한 눈에 품고 있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 종달리는 싸락눈만 내렸습니다.


동백과 비파
▲동백과 비파 김민수

종달리, 송당리, 교래리로 이어지는 민가의 담엔 비파나무의 꽃이 진한 향기를 품고, 붉은 동백의 홑꽃이 수줍은 듯 피어 노랗고 하얀 꽃술을 내보이며 흰눈을 시샘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송당리에서 보는 비파와 붉은 동백이 유독 향기롭고 진했습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야트막한 돌담 사이로 피어있는 비파나무와 동백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낯선 길손의 헛기침에 놀란 강아지가 짖어대다가 이내 꽃을 바라보는 길손이 자기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줄 알고 꼬리를 치며 반깁니다.

그렇게 삼십 여분을 송당리의 비파꽃과 동백꽃 속에서 보냈습니다. 동백꽃처럼 붉은 잉크에 비파나무의 향기를 담아 하얀 눈위에 동백의 노랗고 하얀 꽃술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희망, 사랑, 시, 노래, 꽃들의 이름.

하얀 눈 위에 쓰고 싶은 단어들을 하나 둘 떠올려 봅니다. 제법 차가운 겨울바람이 귓볼을 시리게 하지만 여름은 더워야 여름같고 겨울은 추워야 겨울같다는 선인들의 말을 생각하니 오히려 겨울바람이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있어야 해충도 적고, 꽃의 색깔과 향기도 더욱 예뻐지고 진해진다고 합니다.

덩굴용담의 열매
▲덩굴용담의 열매 김민수

어쩌면 저는 고질병에 걸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오래 전부터 알지 못했던 고질병이 도졌는지도 모르겠고, 상사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냥 좋았습니다. 화원에서 곱게 자란 이들에게는 눈길이 가질 않는데 들에, 밭고랑에, 논두렁에 핀 꽃들에게는 "와! 예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가지 꽃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겨울에도 그 꽃의 흔적을 찾아 서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산수국의 헛꽃
▲산수국의 헛꽃 김민수

어느 날인가 분명히 꽃이 내게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마치 파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와 발목을 적시고는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 같은 아릿한 소리, 원색의 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설원 속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신발틈으로 스며든 눈들은 온기에 녹아 발을 적셨습니다. 파도가 발목을 적시어 가듯이.

김민수

절물휴양림을 지나 언덕길, 물찻오름을 올라가는 길을 지나서 가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곳에 왔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인 것 같았는데 꽤나 먼길처럼 느껴집니다. 아니면 길지 않은 길을 꽤 멀리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그 곳에서 하얀 눈 위에 빨갛게 새겨진 연애편지의 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붉게 타는 마음으로 하얀 눈 위에 시를 쓰고, 편지를 씁니다. 이 한 줄의 고백이 당신께 전해지길 간절히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보는 이 없어도 이렇게들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햇살 한 줌만으로도 행복해하며, 감사할 줄 알며, 소중해 하면서 이렇게 진지하게 살아감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꼬옥 쥐고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하며 하얀 눈 위에 새겨진 편지들의 나머지 구절들을 찾습니다.

이끼의 포자낭(삭)
▲이끼의 포자낭(삭) 김민수

이끼의 싹들이 옹기종기 눈 위에 점을 찍은 듯 갈색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여린 몸뚱아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전해야겠다는 열정이 담겨져 있어 눈을 녹였습니다.

도대체 우리들은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는 존재들인지요? 가지고 또 가져도,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배고파하고, 허기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힘만 있으면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당당합니다. 자기 눈에 대들보가 들어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제 몸에 똥이 뭍어 있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이요, 남의 몸에 뭍어 있는 재입니다.

가진 것 몸뚱아리 밖에 없는 작은 존재, 어쩌면 인간의 무지막지한 발자욱 하나면 으스러질지도 모를 그 작은 존재들도 옹기종기 모여 사랑을 만들며 눈을 녹여가고, 따스한 햇살 한 줌을 그리워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서로 다투고 싸우며 서로를 시기하며 살아갑니다.

제주조릿대
▲제주조릿대 김민수

자연 속에 들어와 서성거리다 보면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이 저에게 쓴 연애편지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이 주는 연애편지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간 듯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오던 길을 돌아보면서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도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오래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으니 매섭던 겨울바람도 오히려 몸을 움추리는 것 같습니다. 온 이 따스해지면서 땀이 납니다. 세상의 이치란 이런 것이기도 하겠지요.
한 여름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하다 잠시 앉아서 쉬면 아주 세미한 바람에도 온 몸이 시원해지고, 한 겨울 혹한에도 산에 오르다보면 온 몸에 따스함이 넘쳐서 땀을 흘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고난같은 것들도 이렇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당히 맞서라'는 말이 허툰 말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지금은 겨울의 시작입니다. 아직도 봄은 멀었습니다. 그러나 이 겨울 속에 봄은 이미 깃들어 있습니다.어찌 겨울이 이 이치를 거부하고, 봄 또한 이를 포기하겠습니까.

눈을 이고 있다가 이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하얀 눈 위에 하얀 잉크로 꾹꾹 눌러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저도 편지를 씁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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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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