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는 게 장사치 인생"

희망이 사라진 대전 역전시장 노점상들의 겨울

등록 2003.12.30 08:41수정 2003.12.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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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추위 속에서도 그들은 삶을 노래한다.
▲차가운 추위 속에서도 그들은 삶을 노래한다. 곽진성
12월 28일 새벽, 날씨가 몹시 차다. 겨울의 찬 공기가 사람들의 마음도 움츠리게 하는 시간, 대전의 밤은 깊어 간다. 모두가 잠든 밤의 공허함을 메우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대전역 앞의 장사치들이다.

깊어가는 대전의 밤을 벗삼아 역전에서 그들의 삶은 시작된다. 하지만 추운 날씨 때문일까. 역전 게시판에 적혀 있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라는 '대전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장사치들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느껴진다.

불도 지피고 장갑도 두 겹으로 준비하고 몇 십년을 해온 생활이기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살을 에는 겨울 추위는 영 견뎌내기가 힘들다. 그렇게 징그럽게 악착같은 삶이 만들어 낸, 지독한 단속에도 힘들게 이어온 땀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대전 역전 시장이다.

주머니에 손도 넣고, 불도 지펴보건만 한겨울의 이 추위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주머니에 손도 넣고, 불도 지펴보건만 한겨울의 이 추위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곽진성
"낮에는 단속반원들이 물건을 다 가져가 장사할 수가 없어. 이제 다시는 그 시간에 장사할 엄두도 안 내지만, 물건은 제발 가지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건을 뺏기면 우린 살 수가 없어."

이제 낮에는 장사할 생각도 않는다며 한 노점 장사치가 푸념한다. 장사치들의 땀이 어려 있는 시장. 하지만 노점상에 대한 단속은 가혹하리만치 심하다. 돈이 없어 가게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은 단속반에 내쫓기며 이리저리로 쫓겨 다닌다.

"자리에도 주인이 있는 거여? 십수년을 함께 한, 정든 내 자리란 말이여. 우리 같은 이들도 살아가야 할 거 아니여?"

오후 시간, 역전 근처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룬다. 버젓이 간판을 내건 상점에서는 제일 장사가 잘 되는 오후 시간이건만, 노점 장사치들의 벌이는 영 시원치 않다. 노점상 금지 간판만이 휑하니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은 출근 준비에 바쁠 때 장사치들은 물건 정리하기에 바쁘다. 자칫 늦었다간 단속반원에게 물건을 전부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은 출근 준비에 바쁠 때 장사치들은 물건 정리하기에 바쁘다. 자칫 늦었다간 단속반원에게 물건을 전부 빼앗기기 때문이다. 곽진성
간간이 단속을 하던 공무원들이 퇴근을 하는 시간이 되자, 짐 보따리를 든 노점 장사치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저녁 6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낮이 아닌 밤이 그들의 세상이다.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그들의 삶은 시작된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오겠어? 그저 출근길 지나는 이들이 한번 눈길이라도 보아주면 다행이지!"

하나라도 팔아야 반찬값이라도 마련할 수 있기에 새벽 긴긴 밤을 하얗게 새면서 장사를 한다. 벌이가 시원찮아도, 오가는 손님조자 없어도 어쩔 수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오는 손님을 기다려 벌이를 하는 게 장사치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제 상황은 가뜩이나 넉넉지 않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재래 시장은 죽었어. 삶도, 희망도."

추위를 이기려 연신 독한 담배를 피워 대는, 예순을 넘긴 할머니는 팔리지 않는 건어물을 만지작거리며 한탄한다.

"IMF진 뭔지, 그 이후로 장사가 안 돼, 10분의 1도 안 팔려, 경제도 어렵고, 마트가 다 잡아 먹어 버렸어. 죽었어, 재래시장은."

"재래시장은 죽었어, 삶도 희망도."
▲"재래시장은 죽었어, 삶도 희망도." 곽진성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역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시장은 생경맞게 보일 뿐이다. 이곳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옛 시장의 향수를 느끼려는 노인들과 조금이라도 싸게 장을 보려는 악착같은 몇몇 아주머니들 뿐이다.

"나라는 뭐하나 몰라. 가난한 사람들을 살려야지, 부자들만 더욱 부자 되게 하고. 에이, 어느 나라가 가난한 이들이 먹고 살지도 못하게 해?"

한 장사치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연신 주위의 눈치를 살핀다. 공연한 소리를 했다가 혹여 단속이 심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희망은 사라지고 삶에 대한 불안과 염려만이 자리한, 죽어버린 시장. 그곳이 한때는 대전 블루스를 흥얼거리며 삶을 노래했던, 살아 숨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삶이 언제나 일요일은 아니겠지만

"대통령이 이곳(대전)에 왔을 때, 손도 잡아 주고 우리 같은 늙은이 일거리도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지금은 기억도 못하나 봐. 하긴 우리 같은 늙은이 어디서 써주기나 하것어?"

삼삼오오 모여 불을 지피고 있던 한 장사치는, 노인들의 일거리를 마련해 주겠다던 대통령의 지키지 못한 말이 무척이나 아쉬운 모양이다. 대통령마저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시대. 요즘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말을 문제 삼고 그 진의를 의심하지만, 이들 장사치들은 대통령의 말이라도 잡고 싶은 게다. 그들의 그 작은 희망을 대통령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을까?

일요일은 대전 역전 근처의 재래시장, 그리고 노점 장사치들이 활기를 띄는 날이다. 대전 부르스를 흥얼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일요일은 대전 역전 근처의 재래시장, 그리고 노점 장사치들이 활기를 띄는 날이다. 대전 부르스를 흥얼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곽진성

이 추운 겨울날 새벽 장사를 그만두고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장사를 그만두고 집에 편하게 들어앉으라고 말하면 이내 손 사레를 친다.

"아무리 일거리가 있다고, 시장을 어떻게 떠나? 내 삶인데."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다지만 그래도 주말, 특히 일요일 아침 벌이는 그나마 낫다. 그 때는 노점 장사치들의 얼굴에도 활기가 띤다. 일요일에는 단속도 없다.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받고 "자~ 마른 반찬 사세요. 싸게 팔아요"라고 외치는 장사치들의 목소리가 흥겹게 들린다. 지나는 사람들도 그 기운에 감염되었는지 눈 한번 더 돌려 보고, 짧은 흥정을 부쳐 물건을 사간다.

"이런 게 진짜 삶이지. 사람이 있잖아! 재래 시장엔."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밤의 인생. 추운 겨울 늦은 밤에 대전 블루스를 흥얼거리며 희망을 노래하던 그들. 그곳에 재래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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