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끼 하나로 평생 이어지는 우정

고마운 친구가 떠준 조끼를 잃어버렸어도...

등록 2003.12.31 19:24수정 2004.01.0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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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졸졸 따랐던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 ⓒ 김용철

서교(西校)에 다녔던 해림이는 '햇님'이라 불렸다. 백아산 골짜기 중 상 골짜기 촌놈인 나는 동교(東校) 출신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화순온천 근처에 살았던 그 아이와 20리가 넘는 거리의 촌놈의 만남은 개구쟁이 나에겐 행운이었다. 사춘기 절정기 아름다운 추억은 우정으로 이어졌고, 그 오랜 만남은 결혼 직전까지 이어졌다.

2학년 이후로 우린 남녀공학을 극복하고 단짝이 되었다. 공부 잘 하는 몇몇과 함께 이태 동안 특별활동에 늘 같이 했고 옆자리에 앉았다. 일주일에 한번은 영어회화반에서 합법적으로 만났으니 단속이 심한 시절 특별대우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매일 교무실에 학급일지를 가져가며 3반 교실을 훔쳐보기도 했다. 뿐이던가. 청소 시간에 쓰레기 소각장이나 우물 앞으로 꼭 한번은 지나갔으니 내 마음을 알던 아이들은, "규환아~"를 일부러 크게 외쳤다. 또한 아이들은 "해림아!" 깜짝 놀라게 불러서 주위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니 쳐다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럴 때 옹졸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나를 밀치던가 항의를 할 법도 한데 휙 자리를 뜨기만 할뿐이다.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던 걸까? 시험 때만 되면 영어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겐 예상문제를 절반 가까이 미리 알려 주었는데 그 쪽지를 건네주던 전령(傳令)이었다.

2학년 2학기 이후론 학교를 마치고 밤 7시가 넘는 시각 버스 기다리는 동안 중학교 앞 점방 부엌문을 걸어 잠그고 그 바삭바삭하던 고구마 튀김을 얼마나 같이 먹어댔던가. 마치 못 먹던 시절 한창 커나가던 때 허기를 채우듯 우정과 사랑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여걸이었고 여자 깡패였다. 키 작은 나와 키 큰 여학생.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그에게 몇 대 두들겨 맞지 않고 졸업한 경우가 드물었다. 그 만큼 억세고 당차서 그를 두고 "야야, 여자 깡패 지나가신다."라고 짐짓 듣게 하고는 재빨리 도망치기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몇 대 두들겨 맞기 일쑤였는데 나에게 말려달라던 수많은 동급생들이 적지 않았다. 단순한 말괄량이도 아니며 주먹질 일삼는 '칠공주파'도 아닌데 남자들은 언제나 그 여학생 앞에서는 광에 든 쥐 마냥 작아지기만 했다.

그런데 거꾸로 그렇게 무섭던 해림이라는 아이는 내 앞에선 언제나 차분하고 상냥하며 온화한 한 마리 양에 지나지 않았다. 내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수줍음 가득 머금은 소녀는 무슨 생각을 품었을까? 왜 그랬을까?

어렸을 때 비염을 앓아서인지 약간 울림소리를 낼 뿐 듣기에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늘 말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했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야무지게 해내니 내 마음은 벌써 그에게 가 있었다.

거기에 당시 '인기짱'이었던 나를 향한 여학생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보조개가 핀 내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한번 놀고 싶어했다. 그마저 질투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소녀는 남녀 양쪽으로부터 무척 힘든 상황이었을 게다. 여자 애들 접근 막으랴 남자들 편견을 물리쳐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농업 선생이자 2학년 때 담임 그리고 3학년 때 학생 주임 선생님-아이들을 꼬드겨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프로 레슬링을 보다 생전 처음 맞은 매 치고 53대나 때린 사건의 장본인-은 내가 중학교 졸업 후 몇 번 찾아 뵐 때마다 '해림이랑 잘 지내느냐'며 곧잘 놀려댔다.

한편 토요일 오후면 나는 우리 집과는 정반대인 해림이가 가는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여러 친구들과 십리 넘는 길을 걷는데 옆 친구들 이목도 있어 부끄러웠을 텐 데도 나에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다.

까닭은 서유(西酉)에 약간 못 미쳐서 '뒤염재'라는 큰 고개를 넘으면 먼저 나오는 동유(東酉)마을까지 가는 길에 인선이와 중기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두 사촌 형제와는 삼총사로 불리며 남의 부러움을 샀으니 안전판이 따로 없었고 좋은 핑계거리였다.

눈이 발목에 차도록 쌓인 산길을 남자 아이 서너 명 여자들 대여섯 명이 같이 가다가도 난 어떻게든 그 아이 가까이 접근하여 말을 붙여보려 했다.

'해림아!'

사각사각 발소리만 요란했다. 다만 1~2m 근처 뒤를 따르는 걸로 위안을 삼는 것이다. 그게 행복이었다. 그 풋풋한 청춘과 새하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무언의 대화와 솜사탕같이 달콤한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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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으로 고 쪼그만 것이 그러코롬 예쁜 짓을 다 할 수 있었을까요. 하여튼 부럽죠? ⓒ 김용철

이상하게 3학년 마지막 방학이 있기 하루 전. 그날 따라 이상하게도 내 눈에 띄지 않는 거다. 걱정이었다. 이곳 저곳을 어슬렁거리며 찾았다. 아무에게 말못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버스 도착 무렵 같은 마을 친구 명순이를 통해 내게 건네진 도톰한 보따리. 나는 내 삶에 희열을 맛보았다.

고교 진학 시험이 끝나기 전엔 그냥 일상사만 얘기할 뿐 속내 한번 드러내지 않았던 아이였다. 알록달록 은박지로 곱게 싸맨 그 보따리를 풀자 짤막한 편지와 함께 푸르고 잿빛 올이 굵은 실로 손수 뜨개질한 조끼가 들어있지 않은가.

'해림아! 너 누구 줄려고 그래?'
'……'
'누구 줄 거냐니깐? 혹시 규~'
'……'

주위 여학생들의 물음에 묵묵히 웃어넘겼으리라. 달포나 놀림을 감수하며 한 코 한 코 떠나갔을 것이다. 연합고사를 마치고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평소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조끼를 바로 입었다. 동네 아이들의 그 선망의 눈빛은 또렷했다. 약간은 거친 그 옷을 입은 채 자고 일어났더니 살갗이 쓰렸지만 며칠 간 난 그 옷만 입고 다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한달 전. 전화가 마을회관이나 이장님 댁에 딱 하나 있던 시골이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편지로 전해지는 느림보 소식은 가슴만 갑갑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해질 녘 눈길, 칼바람을 마다 않고 대충 소죽을 쒀 놓고 메모하나 남긴 채 집을 나서기로 했다. 눈길은 자전거가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나자빠지기를 반복했다. 안 되겠다 싶어 내려서 체인이 밥먹듯 벗겨지는 자전거를 끌고 갔다.

몸이 꽁꽁 얼어서는 그 친구 옆 마을에 사는 인선이와 중기를 대동하고 "해림아!"하고 나지막이 불러내면 잠시 얼굴을 비출 뿐 이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들어가 버리고 만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들여보내면서도 나는 그 아이를 보러 일주일에 두 번 씩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중기네 집 행랑채에서 잠을 잤다. 이후 내 마음을 전할 일기장 하나를 빼곡이 채워나갔다. 난 그렇게 고교 진학을 앞두고 첫사랑과 애정행각을 벌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졸업식 날 200쪽이나 되는 다이어리에 시와 그림, 내가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하는 지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절절히 적어 선물했다. 식은 마무리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뭇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나서야 우린 현관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걸로 우정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끼를 두어 번 빨았더니 쪼그라들어 내 몸에 맞지 않게 되었다. 어찌나 정확하게 절었던지 자로 잰 듯 내 몸에 맞았기 때문이다. 고교 진학 후 어머니 대신 살림을 맡은 누나가 조끼를 입고 서울로 올라갔다. 오빠 둘과 형제들끼리 운영하던 공장 바깥에 추운 겨울날 물만 빠지라고 잠시 널어 둔 옷을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단다.

그 뒤로 우리 둘은 서른 살까지 만났지만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 정성이 고맙기도 하거니와 나에게 큰 꿈을 안겼던 아낌없는 우정의 선물에 누(累)가 될까봐서다. 그 오랜 동안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던 나는 여전히 그 소녀에게 우정의 상징이 되길 바랄 뿐이다. 먼발치에서 서로를 지켜봐 주는 순수한 두 청춘.

그 아이는 여상(女商)을 졸업하고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섰다. 대학을 절절 매고 다닐 때 학비에 보태 쓰라며 40만원을 빳빳한 배춧잎으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전해진 이 한마디, "규환이가 돈만 좀 벌면 시집가겠는데…" 몇 번이나 주위를 맴돌 때 그 말에 대한 답변을 줄 수 없었다. 그 때 사회활동을 접을 수 없었던 나였다.

부끄럼 없는 사랑, 변치 않는 우정, 아내도 알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쿵쾅쿵쾅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그렇게 세상 살다보면 아름다웠던 지난날 있었음을 감사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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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있네요.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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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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