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스캔, 얼굴 촬영 그리고 4년 전 피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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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bangzza)등록 2004.01.05 15:25
2000년 1월 5일,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주민 3000여 명은 허겁지겁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인근 미군 부대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허위 정보로 판명됐지만, 새벽잠을 설쳐야 했던 주민들은 아마도 '혈맹'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폭발 정보'를 처음 입수한 주한미군은 무려 7시간 동안이나 한국 측에 제대로 상황을 알려 주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한국 합참에 상황을 통보한 것은 미군과 장비를 모두 대피시킨 후였다. 당시 <한겨레>는 사설에서 "미군 쪽의 처사를 보면서 한국민들의 인명이 미군에게는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취급당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감이 든다"고 한탄했다.

정확히 4년이 흐른 2003년 오늘(5일), 대한민국은 또 다른 배신감을 맛보고 있다. 1월 5일부터 미국 공항과 항구에서 우리 국민들은 지문을 채취당해야 하고, 사진도 찍혀야 한다. 외교통상부 홈페이지 '미국, 1.5(월) 국경통제 강화조치(US-VISIT)시행'이란 제목의 공지사항은 차라리 냉정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2004.1.5(월)부터 미국 내 115개 전체 국제공항과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플로리다 등 14개 주요 항만에서 실시되며, 기존의 입국 절차에 추가로 스캐너를 통해 양손의 집게손가락 지문을 스캔하고, 이어 디지털 카메라 앞에서 안면 사진을 촬영"

미국 출장 경험이 많은 MBC 송재우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은 전화통화에서 "그렇지 않아도 9·11테러 이후에 몸수색이 강화돼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신발도 벗으라고 하고, 허리띠도 빼 놓으라고 하고 짐 수색도 철저했다"면서 "(앞으로는) 상당히 기분 나쁠 것 같다. 완전히 범죄자 취급하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표시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감정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도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냈다. 관계자는 "앞으로는 미국 들어가기가 상당히 힘들 것이다. 검색으로 인한 대기 시간도 길어질 것"이라며 "국민 불편을 덜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비자 문제는 주권국가가 갖는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상당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미국의 국경통제 강화조치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27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특별협정을 맺은 캐나다를 제외하면 모두 미국과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한 나라들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비자면제국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예전에는 단기비자거부율, 국제적으로 인정된 수준의 기기 판독 여권(생체인식정보가 포함돼 있는 여권), 미국의 법질서나 안보를 침해하지 않는 경우 등 3가지를 만족시키면 비자면제협정 대상국 목록에 오를 수 있었다"며 "현재는 이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하더라도 목록에 포함될 수 없다. 현재 비자면제국이 영구적으로 결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영구적인 비자 면제 프로그램이 해소된다면'이란 단서에도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단기비자거부율이 3% 미만이 가장 중요한데, 우리의 경우는 7-8%가 나오고 있다"면서 "미국 내 한국인의 불법 체류 비율이 높은 것도 주요 이유중의 하나"라고 덧붙였다.

한국이 서류 관리에서 신뢰도가 낮다는 이유로 비자면제국에서 제외됐다는 설명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미국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2차 대전 때 미국과 혈투를 벌였던 일본이나 독일보다도 그렇다는 말이다. 비자면제국을 제외한 나라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미국을 많이 방문한다는 나라의 국민이 모두 범죄자 취급을 받게 생겼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일부 인사들에게서 나타나는 '미국 짝사랑 현상'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병해야 한다는 국회의원도 있지만, '혈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미국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한겨레>는 "김충용 종로구청장이 지난 2일 오후 기념비 철거와 관련한 여중생범대위와의 면담에서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을 미국이 열어주고 있는데, 이러면(기념비를 세우면) 안 되는 것 같다. 점심을 먹게 해준 박정희를 존경하는데 미국을 불편하게 하면 다시 점심 굶는 시대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비석 하나 세우는 것도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서울 중심가를 통치하는 수장의 논리다.

얼마나 더 미국 눈치를 살펴야 만족할까. 립서비스가 그토록 만족스러운가. <동아일보>에 따르면, 지난 12월 5일 미국 대사관에서 열린 한미관계의 미래에 대한 토론에서 허버드 미 대사는 이화여대 국제학부 학생 30여명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고.

물론 그렇다. 1000명 규모의 자위대를 파병한다는 일본보다도 훨씬 많은 젊은이를 사지로 보내겠다는 나라 아닌가.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이라크에 보내겠다니, 세계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동맹국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할 말을 못하는 걸까. 할 말도 못하면서 왜 자꾸 '형제' 또는 '친구'라고 이야기하는가.

정확히 4년 전, 갑자기 새벽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이웃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자꾸 머리 속에 자꾸 어른거린다. 미국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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