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추기경 모습이 과대 평가됐다?

[주장] 정치인들과 언론은 김 추기경을 이용하지 마라

등록 2004.02.02 17:35수정 2004.02.0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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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일행의 예방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이 "미국이 주적(主敵)이 됐다.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걱정한 것을 두고 언론계가 진흙탕 속에서 뒤엉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던가? 자기 논에 물대기라고 했던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형 보수 일간지들은 "추기경의 지적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원로 종교인으로서의 통찰력이나 예지의 덕분만은 아닐 것"이라고 추켜올렸다.

또한 <조선일보>는 "여느 사람이 그런 걱정 한 가닥을 들추기만 해도 반민족이니 반개혁이니 하는 돌팔매를 받기 일쑤여서 그저 안으로만 삭이며, 입 없는 사람 흉내나 내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의 세상살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추기경의 평범한 세상 걱정이 많은 국민들에게 '나라에는 역시 원로가 필요하구나'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김 추기경의 발언을 십분 이용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 논설위원이자 <오마이뉴스> 고정칼럼니스트인 언론인 손석춘씨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이러한 대형 보수 일간지들의 알량한 행태를 꼬집는다. 이어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평가된 대목이 많다"며 김 추기경을 평가절하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오마이뉴스>가 감히 김 추기경을 공격했다며 포문을 열었다.

추기경의 민주주의 업적은 과장되었나?


김 추기경이 천주교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존경과 애정은 '일부' 천주교 신자들에게 다소 맹목적인 수준으로까지 비약되기도 했다.

추기경도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인 것을 감안하면, 김 추기경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과분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손석춘 논설위원의 주장은 단순히 추기경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이 과분하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손씨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영역에서 김 추기경의 업적이 과대 평가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 운동에서의 김 추기경의 업적이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지, 손씨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어서 그가 말하는 '과대평가'가 옳다 그르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강력한 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그냥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식의 글을 쓴 것은 무책임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에서의 김 추기경의 업적은 정말로 과대평가 받고 있는 것일까? 김 추기경의 과거 행보를 따라가 보자.

1968년 당시 김수환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 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69년 4월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된 그는 정부의 인권탄압이 고조되던 71년 '이 절망적 상황의 돌파구를 찾아서'라는 성탄 미사 강론을 했다. 이는 박 정권의 비상 대권을 비판한 것으로, 이때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란 양자 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국민들에게 경고했다.

이 강론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의 신호탄이었다. '한국 천주교 수장'의 이 발언은 4·19 당시 민주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했던 천주교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같은 역할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리잡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a 72년 8월 9일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광복 27주년에 즈음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김수환 추기경

72년 8월 9일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광복 27주년에 즈음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김수환 추기경 ⓒ 평화신문

이듬해인 72년 김 추기경은 '현 시국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여, 7·4 남북 공동성명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8·3 긴급 재정(財政) 명령을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박 정권과 맞서기 시작했다. 추기경의 담화문 발표 후 박 정권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던 성모병원에 대한 세무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유신이 선포된 이후에는 73년 12월 서울 YMCA 강당에서 발표된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이라는 글을 통해 극심한 인권침해 현실을 폭로하고, 일인 집중의 권력구도에서 벗어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제도를 확립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한 지학순 주교가 74년 9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자 민주화를 갈망하는 젊은 사제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조직했다. 이들이 개최한 시국기도회에서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정의구현사제단의 발길에 힘을 싣기도 했다. 이 때문일까? 그 이후 추기경은 오랫동안 정의구현사제단의 '배후'라는 세간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는 '광주 유혈 사태에 대해 정부는 사과하라'는 제목의 시국 담화문을 통해, '광주 유혈 사태'가 정부의 강압 통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광주 유혈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 공권력을 빙자한 무력 사용 중단, 계엄령 해제, 광주 사태 책임자 처벌, 양심수 석방 등을 촉구했다.

또한 같은 해 7월 22일 몇 명의 천주교 성직자가 광주 사태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자,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의 시국 담화문을 발표하고 구속된 성직자들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김 추기경의 업적이 위와 같은 데도 손씨가 김 추기경의 업적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추기경의 인간적 한계

손씨의 말처럼 추기경의 발언이 사실과 뒤틀려 있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안타깝다. 물론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진 것도 사실이다.

위와 같이 한 시대의 통찰력과 예지의 상징이었던 김 추기경이 '걸림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김 추기경의 인간적 한계다. 이제 추기경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연로하다. 추기경의 나이는 우리나라 나이로 여든셋이다. 이제 한 평생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데 시간을 쓰실 분에게 이 사회가 원로의 자리를 너무 강요해 온 것이 아닐까?

둘째는 추기경의 종교인으로서의 한계다.

김 추기경은 종교적 똘레랑스의 표상이다. 그리스도교나 구교만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고, 불교나 유교와 같은 타 종교의 가치를 존중함으로써 관용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필자는 정치적으로도 김 추기경이 똘레랑스의 정신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한다. 또한 김 추기경은 자신이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인 사람이 되길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치인들은 김 추기경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늘 김 추기경이 자신의 편임을 확인받고 싶어했고, 언론은 늘 김 추기경의 의중을 궁금해했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거짓말 못하는 종교인 특유의 품성 때문인지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김 추기경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씨에게 투표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당시 4위였던 박찬종 후보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김 추기경의 정치적 '지지'는 단순히 정치적 신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당시 김 추기경의 표현대로,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바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오랜 시간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지낸 김대중씨에 대해 가지는 진한 연민과 함께, 같은 신앙을 가진 이로서의 애정이 함께 묻어난 것일 게다.(김대중씨와 박찬종씨는 천주교 신자다)

이 점은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 추기경이 누굴 지지했는가를 살펴보면 더 확실하다(물론 여전히 '공식적인' 지지는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거대 야당과 힘없는 대통령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과반수가 훨씬 넘는 무소불위의 거대 야당. 하는 일마다 발목 잡혀 바둥대며 힘겨워하는 대통령. 가히 '야당 독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작금의 상황에 대해 거의 평생토록 강력한 대통령만 경험했던 김 추기경이 객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그 거대 야당의 대표 또한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반드시 자신의 종교를 신봉하는 신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예배 도중에 설교하는 종교 지도자도 존재하는 마당에 이러한 김 추기경의 생각과 행동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지도자로, 한 인간으로 당연한 인지상정이 아닐까?

비극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종교적 관계에 의해 정치적 입장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종교인을 우리 사회,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이 선정적인 시각으로 이용한다는 데 있다.

종교지도자나 사회원로들은,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첨예한 사회 갈등 상황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김 추기경의 역할이 그랬다.

그러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종교지도자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갈등 상황에서 이용하는 일은 이 사회 전체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마다 철마다 원로라는 이름으로 김 추기경을 예방하는 정치인들의 행동은 그 의도의 불순함에 비쳐볼 때 중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정치인들의 '예방'은, 그야말로 '예방'으로 끝이 나야 한다.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이는 행동 자체가 그 '어른'을 욕보이는 행동이라는 점을 우리 사회는 왜 모를까?

종교 지도자나 사회원로들의 사적인 정치관을 무분별하게 소개하는 언론의 행태 또한 심각한 문제다. 여든이 넘은 연로한 김 추기경의 사견을 통찰력이나 예지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조선일보>의 경이로운 능력을 애써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래도, 그는 이 시대의 어른이다

20년도 넘게 지나버린 김 추기경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그의 발언을 정당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김 추기경의 맘에 들지 않는 발언 때문에 과거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김 추기경의 행적을 모두 무시하는 행동 또한 옳지 않다.

과거 암울했던 시절 다른 이들이 하지 못했던 말을 해왔던 김 추기경이 한국 사회에서 노상 '원로'로 꼽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비록 김 추기경이 과거 '민주 투사'는 아니었어도 그는 한 시대의 거울이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씨의 주장대로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빛 바래가고 있는 명동성당의 상징성 또한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업적으로 인해 서서히 형성되어 6월 항쟁 때 꽃 피운 것이 아니던가?

그런 어른이 세월이 흐르고 혜안이 어두워져서, 설사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올바른 의견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평생 해온 일을 모른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의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에서도 어긋난다.

손씨의 말처럼,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가 지나친 말을 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 가운데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손석춘 논설위원이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아니면 필자가 알지 못하는 김 추기경에 대한 부정적인 사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후에 김 추기경에 대한 평가가 '과대평가'라 논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손씨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 근거 없이 그냥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공감을 주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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