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폐사지에 꽃이 피어 올랐다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를 다녀와서

등록 2004.02.05 13:14수정 2004.02.0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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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법천사터는 한창 발굴 중이다.

법천사터는 한창 발굴 중이다. ⓒ 이종원

모든 것이 지치고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폐사지를 걷는다.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들녘은 황량할 뿐이다. 그 처연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에 거닐어야 제 맛이 난다. 마음 속으로나마 쓰러진 돌덩이를 다시 세우고 천년 전 고려 석공과의 만남을 통해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난 겨울 폐사지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문막에서 남한강을 따라 가면 부론면이 나온다. 그 직전에 법천사지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조금 지나면 다리가 나온다. 실은 다리 건너기 전부터 절집이었다. 밭고랑 곳곳에 절이 있었던 흔적을 발견된다.


a 법천사지 앞에 힘겨운 고목이 서 있다.

법천사지 앞에 힘겨운 고목이 서 있다. ⓒ 이종원

저 멀리서 오래된 느티나무가 어여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나무는 수백년 동안이나 폐사의 탄식을 내뱉었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으면 속이 타들어 갔고 안쪽은 썩어 텅 비었다. 한 맺힌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 준 느티나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a 법천사지 당간지주

법천사지 당간지주 ⓒ 이종원

당간지주

느티나무를 지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멋지게 치솟은 당간지주가 나온다. 예전엔 이곳이 절 입구였음을 말해준다. 주변엔 밭이 펼쳐져 있고 공장까지 가까이 있어 돌은 오늘날까지 삶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다. 돌이끼와 곰팡이만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한 때 당간지주 가운데 깃대가 올라가고 휘황찬란한 깃발이 펄럭였을 것이다. 이 곳을 지나면서 깃발을 보고 합장했던 선조들의 심성을 상상해 본다. 당간지주와 절터는 꽤 떨어져 있다. 법천사가 얼마나 큰 절집인지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a 국보 101호 법천사 지광국사 부도비

국보 101호 법천사 지광국사 부도비 ⓒ 이종원

지광국사부도비(국보 59호)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현재 법천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도비를 만나기 위함이다.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부도전에 올라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텅빈 절터지만 그 규모는 대단하다. 발굴하면서 땅 속에 묻혔던 돌덩이와 기왓장들이 햇볕을 쬐며 기지개를 펴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석물들이 참 정겹다.

지광국사 부도비를 만났다.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상에나! 이런 조각물이 있다니…."

a 부도비 귀부

부도비 귀부 ⓒ 이종원

귀부를 먼저 보자. 강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목을 쭉 빼고 튼튼한 치아를 드러내고 있다.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이다. 정면을 응시하며 턱수염이 목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밍크 코트를 입은 귀부인처럼 목 부위 가죽은 살짝 말아 올려졌다. 그 곡선미에 탄복해 본다. 거북의 발밑은 구름문양이 새겨져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북이다.

a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다.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다. ⓒ 이종원

거북의 등껍질은 바둑판 문양처럼 사각이다. 가운데에는 '王' 자가 새겨져 있다. 지광국사가 왕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승려가 국왕의 대우를 받았다니 지광국사는 참 대단한 고승인가 보다.

a 비신의 측면엔 역동적인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측면엔 역동적인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 ⓒ 이종원

나는 비신의 측면을 가장 사랑한다. 불타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모습이 무척이나 역동적이다. 보통 2마리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모습인데 이 곳은 다르게 그려져 있다. 아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기 직전의 모습이고 위의 용은 하늘로 올라가면서 못내 아쉬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넉넉한 고려인의 양보의 모습이랄까? 용의 몸통을 만지면 비늘 하나가 뚝 떨어질 것 같이 사실감 있게 묘사되었다.

비신 상단부 전액 좌우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으며 둘레에는 당초문이 둘려 있고 비천상·산·나무·해와 달이 빈틈없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종이나 천에 그린 것처럼 정교하다. 우리 선조들은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말을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수도한 내력과 행장이 기술되어 있고 뒷면엔 탑비를 건립한 당시 법천사의 승려수와 건립내역까지 적혀있다.

a 부도비의 이수는 왕관모양을 하고 있다.

부도비의 이수는 왕관모양을 하고 있다. ⓒ 이종원

이수도 참 특이하다. 보통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조각을 새겨 넣는데 이 곳은 왕관 같은 모자를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연꽃과 구름문양, 귀꽃까지 빽빽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꼭대기엔 보주까지 얹어 놓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탑비라는 칭호가 틀린 말은 아니다.

a 화려한 석조 부재

화려한 석조 부재 ⓒ 이종원

지광국사 부도비 주변에는 절터에서 옮겨온 광배 탑의 부재 등 여러 석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온전한 모습은 하나도 없지만 남아 있는 석재는 하나 같이 명품이다.

그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석물이 내 시선을 고정시킨다. 제과점에서 갓 구워낸 빵처럼 꽃도 부풀어 올랐다. 그 바깥에 새겨진 이파리의 돋을새김도 실물이 아닐까 착각에 빠지게 한다. 양쪽 테두리에 새겨진 꽃 문양도 놓칠 수 없는 감동이다. 나뒹구는 석물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원래 법천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어쩌면 그런 돌들이 완전하지 못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차가운 동토에 철퍼덕 주저앉아 하염없이 돌을 어루만졌다.

아-.법천사 돌무더기여.

a 법천사 지광국사부도 (국보 101호) 국립박물관 소재

법천사 지광국사부도 (국보 101호) 국립박물관 소재 ⓒ 이종원

법천사 지광국사부도(국보 101호) 국립박물관 소재

우리나라 부도 중에서 가장 화려한 부도를 꼽으라면 난 지광국사 부도를 꼽는다. 빼곡이 채워진 조각도 아름답지만 그 형식도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대의 아픔을 경험한 부도라서 그런지 더욱 애착이 가는 부도다. 고생한 자식이 더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아마도 지광국사가 입적한 1085년을 전후해 조성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네 모서리에는 용의 발톱 같은 조각이 안쪽으로 말려 있어 안정감을 보여 주고 있다. 기단부만 무려 7층으로 쌓여 있다. 한 번 세어 보라. 각각의 석재에는 안상(코끼리 눈모양), 연화문(연꽃문양), 초화문(풀과 꽃무늬), 보탑, 신선(도교에서 말하는 신선) 등의 조각 장식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법천사지 가는길

1) 자가용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서 문막IC에서 빠져나간다. 나오자마자 좌회전하여 시내를 관통하여 여주 쪽으로 가면 문막교가 나오고 그 앞에서 좌회전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간다. 부론면 소재지 직전에 법천사지 들어가는 푯말이 있다.

2) 대중수단
동서울터미널-문막-부론까지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탑신부에 있다. 페르시아계 사람들이 사리 공양을 들고 가는 신비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당시 서역인과 교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붕돌 밑에는 술이 달린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불상·보살상·봉황 등의 조각이 가득 채워져 있다. 탑의 상륜부처럼 형식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지광국사 부도처럼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부도가 또 있을까? 원래 부론면 법천사지에 있던 것이었는데 조각이 화려하다보니 일제 때 일본 사람이 오사카로 밀반출했다가 조선의 항의에 못 이겨 반환했고 오늘날 국립박물관 정원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용산으로 국립박물관이 이전하면 부도는 또 한번 이사해야 한다. 천년을 살았던 고향을 잊은 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는 부도가 그렇게 측은해 보일 수 없다. 이왕 옮길 생각을 했으면 고향 법천사지에 보내는 것이 어떨까?

경복궁 마당을 거닐어 보라. 그리고 지광국사 부도를 만나자. 부도를 바라보노라면 예술혼에 불타는 고려 석공이 내리치는 정 소리가 들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onol4

덧붙이는 글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on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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