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만 잡사람은 있나?

[책읽기가 즐겁다 60] 농사꾼이 된 윤구병 선생 이야기

등록 2004.02.06 15:36수정 2004.02.0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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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잡풀'이 없다니?

a <잡초는 없다>라는 책 겉그림입니다.

<잡초는 없다>라는 책 겉그림입니다. ⓒ 보리

<잡초는 없다>라는 책이 처음 나오던 때(1998년), 저는 신문을 돌리며 먹고살았습니다. 새벽일을 마치고 아침에 밥을 먹으며 신문을 뒤적이다가 <잡초는 없다>란 책이 새로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이것 참 읽을 만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낮 자전거를 타고 동네 책방에 가서 서서 구경했습니다. 그때 이 책을 사서 읽고는 싶었으나 한 달 벌이가 적어서 사지 못했습니다. 틈틈이 책방으로 놀러가서 읽던 일이 떠오르는군요. 책은 그 뒤로 이태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살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잡초는 없다>란 책을 만났을 때는 먹물 티가 아직 많이 남은 대학교수가 잘난 척하느라고 쓴 책이라는 느낌도 받았기에 사는 데에 좀 머뭇거렸습니다. 그 뒤로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지은 윤구병 선생을 만날 일도 있었고, 전라도 변산에 있는 공동체학교에도 가서 일을 거들었습니다.

책으로만 만나던 윤구병이라는 사람과 <잡초는 없다>라는 책은, 실제로 변산에 가서 농사일을 조금 거들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잡초는 없다>라는 책은 여러 번 다시 읽었습니다.

.. '잡초'들과 날마다 땡볕 속에서 싸워야 할 상황이 빚어졌던 것은 우리가 가꾸는 농작물들이 '잡초'와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잡초'라고 여겼던 것이 농사의 훼방꾼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땅에 뿌려준 고마운 먹이라면 어떨까? 따로 가꾸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약초나 나물의 일종이라면? .. <90~91쪽>


윤구병 선생은 언젠가 김매기를 하던 때 마늘밭을 풀밭으로 만든 녀석들을 죄다 뽑아 던져 놓고 나중에 보니 그게 다 별꽃나물과 광대나물이었음을 알고 많이 후회했다고, 자기가 기르는 남새 아닌 것은 그저 잡풀로만 여기지 않았느냐고 많이 뉘우쳤답니다.

맨 처음에는 이 대목을 읽으며 '옳다'하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풀이면 그냥 풀이지, 잡풀이라고 하는 건 거만한 인간들이나 뇌까리는 잡소리가 아니냐"고도 생각했어요. 사람에게 '잡사람'이 없듯 풀에게도 '잡풀'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다가 본 게 윤구병 선생 손이고, 옷이고, 사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제 손을 보고 책 보고, 글쓰는 사람 손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윤구병 선생 손은 말 그대로 농사꾼 손입니다.

투박하고 거칠며 굵다랗고 시커먼 손. 얼굴도 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하얀 손으로 일도 얼마 안 해 보거나, 머리로만 대충 굴려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면서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다시 돌아보았어요.


<2>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말하다

윤구병 선생은 옷을 참 안 갈아입는답니다. 그래서 도시에 와서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내준'답니다. 농사짓는 다른 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셔요. 당신들이 모처럼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저 멀리 간대요. 그래서 전철에서도 서 가는 법이 드물고, 버스에서도 서 가는 법이 드물다더군요.

흙 냄새, 거름 냄새, 땀 냄새가 버무러진 농사꾼을 보며 '더럽다'고 느껴서 내빼는 건지, 시골에서 죽어라 농사를 지어서 도시사람들 먹여 살려서 고맙다고 느끼기에 양보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시골에서 일하는 사람이 날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기는 힘들어요. 그 많은 빨래를 다 짐질 수 없으니까요.

.. 유행에 뒤졌다 하여, 조금 더 불편하다 하여, 남 보이기 부끄럽다 하여, 쓸모 있는 것을 자꾸 버리고 새 것을 사들이는 버릇이 오래 가다보면 나중에는 부모 형제마저 버리게 되지 않을까? 버리지 않는 삶은 버릴 것이 없는 삶, 검소하고 무엇이든지 아끼는 생활 태도의 반영이다. 아껴야 쌓이는 것이 있고, 쌓이는 것이 있어야 남에게 베풀 여유도 생긴다고 보면 안 될까? 그리고 물건을 아끼다 보면 사람 아끼는 마음도 생긴다고 보면 안 될까? .. <121쪽>


어쨌든. 시골 삶이란 버림이 없는 삶입니다. 물건도 안 버리지만 사람도 안 버립니다. 그러니 잡풀이라고 여기는 풀들도 버리지 않아요. 요새는 농사를 경제로만 자꾸 따지니 돈 되는 농사로 달라지고, 온갖 농약과 공업비료를 써서 거두기만 많이 거두려 해요. 그래서 시골 도랑물을 마실 수 없는 요즈음이 되었어요.

윤구병 선생은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요즘 말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이기 일쑤거든요. 공장 노동자가, 시골 농사꾼이 말하는 모습을 만나기 힘들어요. 학교에서도, 언론사에서도, 정부 기관에서도 모두들 책상머리에서 일을 합니다.

<잡초는 없다>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없을 것, 없어야 할 것이 아이들 주변에 있으면 없애야 한다.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한다<43쪽>"는 이야기를 큰 줄기로 들려줍니다.

자연이 주는 맛과 즐거움을 사람들이 제대로 느끼기를 바랍니다. 기계화와 도시화가 아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보다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살아가는 일로 채찍질을 한다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물으면서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몇 월 며칠에 심는다는 대답을 해 주실 줄로 믿고 달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 대답은 뜻밖이었다.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이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역마다 토양이 다 다르고 기후도 온도도 다르고 내리는 비도 바람길도 다른데. 그래서 지역에 따라 씨뿌리는 철도 거두어들이는 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몇 월 며칠이라고 못을 박아야 정답인 것 같고,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대답하면 틀린 것으로 여겨온 내 교과서식 지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 <19쪽>


<잡초는 없다>는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며 살다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한 다섯 살배기(지금은 열 한 살이 되었습니다-시골 농사꾼으로 돌아간 지) 어린 농사꾼이 가장 큰 스승이며, 자연에게 배우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담은 이야기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면서 새록새록 새로움을 느끼고, 지난번 읽을 때 못 느낀 깊이를 살핍니다.

<3> 잡사람은 있을까?

땅에서 거두고, 바다에서 거두고, 산에서 거둔 걸 공장에서 이리 쿵떡 저리 쿵떡하며 '물건'으로 만드는 사회입니다. 요새는 매운탕도, 갈비탕도, 커다란 할인매장에 가면 비닐로 덮어서 돈 얼마만 주면 사먹을 수 있습니다. 삼계탕도, 닭죽도, 플라스틱 통에 담긴 걸 돈주고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먹을 수 있어요. 옷도, 밥도, 집도 모두 돈이면 다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옷과 밥과 집을 얻는 일을 하지 않고, 돈만 버는 일을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기르는 문화'로 살아온 우리였어요. 지금 우리는 '만드는 문화'를 살고요. '기른다'는 건 한 해 동안 땀 흘려서 농사를 짓든 무얼 하든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는 문화이고, '만든다'는 건 누군가가 길러낸 것을 얻어서 토닥토닥 매만져서 상품으로 빚어내는 문화입니다.

.. 너희 인간들은 너무 오만해서 자연의 큰 힘에 기대지 않더라도 너희끼리 문명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과신하는 모양인데, 햇볕과 바람과 흙과 물, 그리고 온갖 미생물과 식물과 곤충들이 한데 힘을 합해 이루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순간 너희들이 피땀 흘려 쌓아올린 그 현대문명이라는 것이 바닷물에 휩쓸리는 모래성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이냐 .. <132쪽>

세상 풀 가운데에는 잡풀은 없어요. 하지만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 가운데에는 잡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풀은 말라죽은 뒤에 거름이 되고, 살아 있을 때에도 다른 짐승에게 먹이가 되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윤구병 선생은 <잡초는 없다>를 빌어 '식량자급률'과 '반미' 문제도 살짝 꺼냅니다. "우리 나라에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미국에서 흉년이 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떼죽음을 한다면(미국 식량 수입에 많이 기대고 있으니) 누구를 원망해야지? 실정이 이러한데도 흉년들어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을 보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니!<139쪽>" 하고 말하며 혀를 끌끌 찹니다.


.. 예수나 부처나 혼자 깨우침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람 사는 저잣거리로 내려온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면 깨우침이라는 게 사람 사이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사람 사는 세상을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관계의 고리가 밀집된 곳이 깨우침의 본디 자리이고 .. <195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리는 벌써 "잡초는 없다"는 삶을 살고 있지 싶다고요. 하지만 우리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지는 생각하지 못해요. 더구나 스스로 잡사람이 되려는 삶도 살면서 남을 해치고 짓밟고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잡초는 없다>라는 책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모두 소중한 우리 삶을 잇고 엮어서, 다 함께 잘살 수 있는 누리를 나래를 활짝 펴며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싶고요.

덧붙이는 글 | - 책이름 : 잡초는 없다
- 글쓴이 : 윤구병
- 펴낸곳 : 보리출판사 (1998.5.15)
- 책값 : 6800원

- 이 글은 제 개인 누리집(http://hbooks.cyworld.com)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책이름 : 잡초는 없다
- 글쓴이 : 윤구병
- 펴낸곳 : 보리출판사 (1998.5.15)
- 책값 : 6800원

- 이 글은 제 개인 누리집(http://hbooks.cyworld.com)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보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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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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