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더듬거리고,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아줌마의 자녀 동반 유학 일기 2]

등록 2004.02.25 09:36수정 2004.02.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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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시간으로 2000년 12월 15일 오후 8시 30분 정도면 태평양을 넘어 지구의 반 바퀴 정도 떨어져 있는 오클라호마 윌라져스 공항(Will Rogers Airport)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12시간 소요 되는 장거리 비행기 여행이었는데도 별반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예근(딸아이 이름)이와 현근(아들아이 이름)이는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종알거리고 웃음이다.

아이들의 좌석이 두 줄 건너서 앞자리 창가 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대각선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멀어 질수록 나는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고, 비행기가 날씨 때문에 흔들림이 심할 때면 잔뜩 웅크려들면서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히려 의연했다.

한국에서 15일의 오전을 보내고 출발해서 비행기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또 다시 한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15일로 다시 돌아갔으니 하루를 보너스로 얻은 느낌이다. 달라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40분 정도였다.

초행길이나 마찬가지였고, 아이들 두 명을 혼자 데리고 가는 터라 다소 비행기 티켓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항공사를 이용했다.그 덕분으로 달라스 도착하기까지는 승무원이라든가 손님들이 거의 한국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내린 이후부터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승무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연거푸 묻기까지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첫 기착지인 곳에서 입국신고를 해야 하는데 입국신고를 하기 위해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오기 전에 크게 나가는 방향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쪽은 애틀랜타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가는 쪽이었는데 나는 제대로 목적지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외국 나들이가 처음이 아니였는데도 모든 것이 새롭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입국신고서에서 약간의 형식적인 질문에 답하고 그대로 통과 되었다. 그러나 2001.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입국 절차는 상당히 까다로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 딸아이가 2003년도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고 새로 입학 할 학교의 I-20form을 갖고 출국 했는데, 입국 신고를 할 때 학교의 담당자 싸인 이 자필로 안 되어 있고 타이핑 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어쨌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수하물 구역( Baggage Claim)의 빙빙 돌아가는 많은 비슷비슷한 짐 보따리 사이에서 초록색 리본을 단 여섯 개의 이민용 가방이 차례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여기 미국 땅덩어리까지 오느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져서 형태가 일그러진 모양 사나운 그 짐 보따리들 속에는 바로 우리 세 식구가 의지하면서 앞으로 입고, 먹고 해야 할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무거운 짐들을 카터기에 옮기느라 쩔쩔매고 있는데 키가 큰 흑인 남자가 다가와서 도와준다. 어찌나 고맙던지. 짐 검사를 받기 위해서 세관 신고서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차례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앞섰다.

이런저런 옷가지들, 효자 노릇 할 거라고 하면서 남편이 노인네처럼 궁시렁거리면서 꾹꾹 다져 넣어 준 밍크 담요, 베개, 그 사이 사이에 친정아버지가 요령껏 이리저리 넣어주신 프라이팬, 접시, 밥공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먹어야 할 것이 있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친정어머니가 넣어주신 장 볶음, 김치, 미역, 김, 콩이며 잡곡 등등 이런 것들을 다 쏟아부어서 검사하면 어쩌나 싶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이틀 삼일 걸려서 꾸린 짐들을 나 혼자 다시 꾸릴 생각을 하니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관원은 친절했고, 여섯 덩어리 중에서 한 짐만을 대표로 집어서 집중적으로 검사를 했다. 그 가방에는 김치와 밑반찬이 들어 있었고, 아이들 운동화를 비롯해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주로 차지하고 있는 가방이었다. 김치는 몇 번씩 싸고 싸서 넣은 것이었는데 여전히 냄새가 스며 나왔다.

미국인 세관원이 웃으면서 한국말로 "김치……" 한다. 이렇게 해서 세관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대한항공(Korean Airline)에서 파견된 승무원이 조그마한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짐들을 오클라호마 국내선으로 모두 부치고 나니 저 쪽에서 엉덩이가 유난히도 큰 표정 없는 한 흑인 여자가 다가와서 게이트(Gate)22라고 되어 있는 쪽지를 주고 간다.

국내선 델타(Delta)로 옮겨다줄 차를 타기 위해서 아이들 두 명의 손을 꼭 잡고 한국인 승무원이 가리켜준 방향대로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부터는 완벽하게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없이 위축되어지고 작아져만 가는 것일까.

달라스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휙 돌아가 있는 고가 도로는 마치 놀이동산의 청룡열차처럼 삭막하고 위협적으로 해 보였다. 12월 한겨울의 날씨는 한국 날씨 못지않게 혹독했다. 거리에는 자그마한 밴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의 차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gate 22라는 쪽지를 안내하는 흑인 여자에게 내 보이니까 9인승 정도 되어 보이는 차를 타라고 가리켰다.

혹독한 첫 신고식

아이들과 나는 달랑 그 차를 타고서 운전사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인 노부부가 올라탄다.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러 오셨다는 두 분은 이런 나들이가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은 갔다고 생각할 즈음 델타(Delta)항공사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말한 게이트 넘버(gate number)22 라고 말한 나의 발음을 잘못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자 우리를 다시 태우고 조금 더 돌아가서야 내려준다.

한국의 조그마한 버스 대합실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여권과 티켓을 들고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줄은 움직여 갔고 아이들을 뒤돌아보니 조금은 지친 듯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고 절차를 밝고 있던 여자의 무표정한 모습과 느린 손놀림 속에서 뭔가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What's wrong? What happened?"(뭐가 잘못됐습니까?)

나는 물었고, 여자는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말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그 여자는 계속해서 컴퓨터 좌판만을 두들기고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이런 경우 영어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적당한 말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입안에서 침이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티켓에는 이상이 없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 윗사람으로 보이는 아주 자그마한 흑인 남자가 나와서 담당자와 나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한다.

오클라호마에 10년 만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모든 비행기가 전면 취소되어졌다는 것이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오클라호마로 부쳐졌던 짐들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로비의 저쪽 끝 쪽에서 언제부터 계속 돌고 있었다.

어마어마 한 무게의 저 짐들과 어린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 항공사 쪽에서 손님들에게 어떤 조처를 취해 주는 것인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 건지 아무 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말은 더듬거리고 머리는 하얗게 비어져가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 중에서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한국말을 말할 수 있는 직원이 있는지 물었다. 그 직원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비집고 올라왔다.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었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키가 큰 친절한 흑인 여자가 나와서 안내를 해준다.

오클라호마까지 가는 대형버스가 올 테니 그것을 타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무거운 짐들을 끌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정도 내려오니 거기에는 나처럼 버스를 타고 가려는 사람들이 열명 정도 넘게 추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동양인은 우리 세 식구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마중하러 나오기로 되어 있는 조 선생님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공중전화는 어디에 있나? 코인이 없는데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기본적인 생활 방법까지 다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넉넉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60세 정도의 미국인에게 나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동전이 없는지를 물었다. 자기에게는 동전이 없지만 전화를 걸 수 있는 자기 카드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시도했으나 조 선생님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선이 잘못 된 걸까? 머리는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다.

그 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동양인인데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롭게 잘 안되고 있고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연락이 안 되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니 계속해서 '조' 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서 여기 상황을 알려줘라 그런 부탁의 전화를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지 20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의사전달을 못해서 도와주려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으려는 나나 서로가 진땀을 빼고 있었다.

달라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거의 다섯 시 정도였으니 지금은 몇 시쯤 되었나? 저녁 먹을 시간은 한참 지난 듯싶은데…. 델타 항공사 쪽에서 제공한 햄버거와 물 그리고 사과가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우리가 안 되어 보이는지 하나씩 손에 들려준다.

아이들의 표정은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계속 밝은 모습이다. 엄마가 있는데 우리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어 하는 완벽한 믿음의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한국에서 만들어온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몇 개월 전 뉴욕 씨라큐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동료 선생님의 조언으로 수신자 부담으로 하면 지정된 일련의 번호와 지역번호 전화번호 순으로 누르면 어디에서든지 전화가 될 수 있는 전화를 신청했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국으로 그 긴 전화번호를 틀릴세라 꼭꼭 눌렀다. 남편은 회사에서 근무할 시간이었다. 남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눈물이 났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난후 미국에 있는 조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예기치 못한 긴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사전에 한번쯤 생각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경험을 통해서 얻었다면 이 끔찍스러운 그날의 기억은 조금은 제몫을 하는 셈이 되는 건가.

주변은 눈이 내려서 어수선하고 질퍽거렸다. 삼사십 분 지났을까 대형버스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추운 시멘트 바닥에 정말 모양새 없이 간신히 세워 놓았던 짐들을 그 차에 어떻게 옮겨 실었는지 지금은 분명한 기억이 없다. 차는 출발을 시작했고 거리는 가로등만이 이따금씩 비추고 있었다.

주변은 점점 깊게 내린 눈 속에서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배가 고픈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차가운 햄버거를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나는 한 입을 베어 물다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비닐에 싸서 가방 한 귀퉁이에 처넣었다. 길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지만 버스는 쉼 없이 가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독일 나치들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간신히 기차에 올라 탄 유태인들의 지친 얼굴에 떠오르는 한 줄기의 안도의 빛. 지금은 돌아보면 한번 씁쓸하게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나름대로 비장한 기분마저 들었었다.

화장실이 뒤쪽에 달려 있는 버스였는데, 화장실을 갔다 오다가 보니 아까 친절하게 도와주시던 그 여자 분은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뭔가 너무나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담배를 줄곧 피우면서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새벽 1시 정도쯤 되어서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윌라져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 긴 버스는 사람과 짐을 내려놓고 사라졌고, 아이들에게 짐을 맡기고 나는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그러나 전화를 걸 수 있는 동전이 없는데다가 10불을 주고 산 전화카드마저 불량인지 전화가 되질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예근이가 달려왔다.

“엄마 어떤 아저씨들이 와서 무조건 우리 짐을 실어가지고 어디로 가버렸어요” 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옆의 사람의 도움을 간신히 받아서 조 선생님에게 전화연락을 한 다음 급히 뛰어갔다. 지금은 어디에 가도 불편함 없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1학년, 겨우 교과서 속에서만 영어를 접했던 딸아이는 이 물건들은 우리 것이고, 엄마가 전화 통화를 끝마치자마자 금방 돌아 올 거라는 말을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짐이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상황이 악화 될수록 나의 영어 소통능력은 바닥을 헤맸고, 다리는 후들 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록 물건을 도로에서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런 경우에 짐들을 한꺼번에 실어다 수하물 구역에 (Baggage Claims) 갖다 놓는 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로처럼 생긴 길을 타고 아이들과 아래로 내려 와 보니 귀퉁이에 짐 더미들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무릎을 꿇고 소리 내어서 울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입성의 첫 관문을 넘었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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