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듯이 언어를 습득하는 현근이

아줌마의 자녀 동반 유학 일기(6)

등록 2004.03.11 12:04수정 2004.03.2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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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근이가 다닐 초등학교는 조용한 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학교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오솔길을 따라 산책 하듯이 천천히 걸어가면 30분 정도 거리의 위치에 있다.

현근이네 학교는 ESL과정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만약에 ESL과정을 들으려면 버스를 타고 ESL 교실이 열려 있는 학교로 가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오후 수업을 받아야 했다.

현근이 담임선생님이셨던 Ms.Q 선생님은 일부 공립학교에서 열어 놓고 있는 ESL 프로그램을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신뢰하지 않았다.

주로 ESL과정은 스페니쉬 계통의 선생님들(Bilingual Teacher: 두개의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많기 때문에 스페니쉬 억양이 강한 영어를 가르치고, 학급도 각 학교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현근이 영어 습득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다인종을 받아들여서 형성된 국가이기 때문에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기본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미국은 자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과 (무료 영어 교육 프로그램은 엄청나게 많다) 언어 습득에 관한 이론을 정책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현근이의 영어 교육을 위해서 Ms.Q 선생님 외에도 세 명의 선생님이 더 매달렸다. 현근이가 언어 때문에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선생님과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배려를 해주었다.

주정부에서 월급이 지원되는 보조 선생님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자원봉사자들이 학교를 찾아와 현근이의 책읽기(Reading)를 지도하는 일이 같이 병행이 되었다.


Ms.Q 선생님 덕분에 현근이는 그야말로 ‘영어의 바다’에 빠지게 된 셈이다. 영어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현근이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내심 불안 했지만, 일단 담임선생님의 생각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선생님들은 굉장한 열정의 소유자로 아이들에 대한 욕심이 컸다.

선생님은 현근이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도와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선생님과 나 사이에 교환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현근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전달 사항이 무엇이 있었는지 물어본 후 그 내용을 그대로 영어로 노트에 적어서 학교로 다음날 보내는 형식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노트를 통해서 쪽지 편지 형식으로 간단히 써서 보내면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 주시곤 했다. 한동안 쪽지 노트는 계속 되었다.

한 달 정도는 언어 때문에 긴장하고 다소 힘들어 했던 현근이도 두 달째 접어들어서는 대충 눈치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것 같았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적응하며 학교 생활을 재미있게 보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반 이상은 놀다가 오곤 했던 것 같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미국의 초등학교는 학교 도서관(Media Center)에서 빌려온 한 두 권 정도의 책 외에는 들어있지 않은, 거의 빈 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다닌다. 심지어 필기도구, 지우개조차도 학교에 두고 다녔고, 교과서도 개인 소유의 것이 아니라 재적수만큼 교과서를 학교 측에서 확보해서 학생들이 한 학년을 사용하고 나면 다음 학년에 물려주었다.

겉표지 안쪽에는 몇년도에 어떤 학생이 그 책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 카드가 꽂혀 있다. 일종의 책의 역사인 셈이다. 복습, 예습을 하기 위해서 교과서를 선생님 허락 없이 가지고 오면 오히려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겉표지도 하드 커버이고 크기도 커서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이런 책들을 들고 다니기에는 힘에 겨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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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난옥

자서전 쓰기와 '아기 돼지 삼형제' 프레젠테이션

3학년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씩을 선택해서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해당되는 내용을 적는 자서전(autobiography)을 쓰는 것이다.

현근이가 한 살이 되던 해, 돌상을 차려준 그림과 설명을 곁들였더니 Ms.Q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현근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나머지 하나인 3개월 프로젝트는 본인이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서 인덱스카드(Index Card: 색인 카드)에 책의 내용을 발표하기 쉽게 파트별로 요점 정리를 하고 그 내용을 나타내는 그림이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아이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숙제는 현근이의 숙제인 동시에 나의 숙제이기도 했다. 겨우 알파벳을 끝내고 간단한 단어인 'apple, tiger, good morning' 정도의 표현을 알고 있던 현근이에게 이 두 가지 프로젝트는 높고도 높은 도전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이미 익숙하게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심의 쉬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도 빌리고, 이웃에 살고 있는 정아(초등학교 2학년)의 책도 빌리고, 심지어 마을에 있는 도서관에도 들락거리면서 책을 빌려왔다.

큰 그림이 많이 들어 있으면서 문장이 간결하고 대화체 위주로 꾸며져 있는 책들을 선정했다. 우선 발표할 책으로‘아기 돼지 삼형제’를 결정하고, 설명할 때 필요한 그림을 만들었다.

부분별로 이야기의 포인트가 될 만한 내용을 그림으로 재미있게 그려서 가위로 오린 다음 라면 상자의 두꺼운 판자 위에 붙여서 약간 입체적인 느낌이 들도록 한 수업 자료를 현근이가 직접 만들었다.

또 거의 외우다시피 책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재롱잔치에서 하는 것처럼 현근이는 아기 돼지 삼형제의 역할을 화장실에서도, 식탁에서도 되풀이해서 연습했다. 미국 아이들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발표 날. ‘아기 돼지 삼형제’는 미국의 3학년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이야기에 해당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놀림감도 될 수 있었을 텐데, 미국 친구들은 더듬거리는 영어 발음이지만 얼굴을 상기시켜 가면서 열심히 발표하는 동양의 친구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Ms. Q 선생님의 넘치는 칭찬 속에서 현근이의 첫 번째 도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럴수록 현근이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틀 후에 현근이는 다른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Ms.Q 선생님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비디오로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손녀, 손자까지 둔 60이 넘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운동으로 다져진 늘씬한 외모와 긴 금발의 머리를 머리 꼭대기로 질끈 묶고 전사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You have many talents. (너는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다)
You are a great actor. (너는 훌륭한 연기자로구나)
I am very proud of you. (나는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You did a great job. (참 잘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현근이가 배부르도록 많이 들었던 칭찬의 말이다. 현근이는 운이 좋게도 삼박자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 눈높이에 맞는 체계적인 독서 프로그램, 격의 없는 미국 친구들과의 놀이를 통해 현근이는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듯이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acquisition)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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